한계 달한 마라톤 선수의 세리머니… 뇌, 죽음 이르는 활동 억제로 가능 고3 공부는 ‘수능’ 끝 보이기 때문, 끝없는 기초연구 크런치모드 불가능 불 꺼지지 않는 연구 위해 불 꺼야
김소영 객원논설위원·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내륙 깊이 자리한 애틀랜타는 덥고 습한 날씨로 올림픽 전부터 기록 걱정이 태산이었다. 많은 경기 시간이 조정되면서 여자 마라톤도 이른 오전으로 변경되었지만 관례상 폐막식 직전 열리는 남자 마라톤은 원래대로 오후 5시에 시작했다. 한마디로 사우나 속에서 (보통 사람 기준으로 100m 전속력에 가까운 속도로) 40km 넘게 달려 마지막 구간인 스타디움에 들어선 것이다. 녹스는 그 자신이 마라톤을 70번 이상 뛴 저명한 운동생리학자로 이런 무지막지한 날씨를 무시하고 비꼰 게 아니었다.
과학자로서 녹스에게 퍼즐은 마라톤 선수들이 결승선을 통과하고도 트랙을 도는 세리머니를 할 만큼 기력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선수들이 한계까지 달렸다면 결승선 근처에서 막판 스퍼트를 하거나 우승 후 국기를 두르고 트랙을 도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마라톤 전설만 봐도 아테네 전령이 승전보를 전하려고 쉬지 않고 달려 소식을 전하고는 쓰러져 죽지 않았나. 그렇다고 생애 마지막 올림픽 출전이 될 수도 있는 경기에 이봉주 선수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리 없다.
연구개발도 비슷하다. 끝이 보이는 기술개발이라면 건강엔 해롭겠지만 주어진 시간에 크런치 모드(집중적인 업무 수행)로 작업해 끝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초 연구를 크런치 모드로 할 수는 없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20여 개 과학기술 유관기관이 공동 주관한 전국 순회 과학정책 대화가 열렸다. 그중 한 행사에서 추첨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초대 소장이자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의 기초를 놓았다고 평가되는 최형섭 박사의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나눠 줬다.
그때 한 대학원생이 이런 질문을 했다.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가 성과를 낼 수 있는 시스템인가? 이젠 연구소도 시간 되면 퇴근하고 불 꺼지는 연구소가 되어야 하지 않나? 당시 행사에 참석한 어느 교수가 행사 후 이런 불만을 토로했다. 연구소는 공장이나 회사처럼 돈 받고 남의 일 하는 게 아닌데 칼퇴근이 말이 되나.
둘 다 맞고 둘 다 틀리다. 연구소는 불이 꺼질지 몰라도 스스로 좋아서 하는 연구라면 불이 꺼지겠나. 동시에 연구소에서 하는 연구가 오롯이 자신만의 연구는 아니다. 대학원생이나 교수나 똑똑해서 이 미묘함을 모르는 게 아니고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게 아닐까. 불 꺼지지 않는 연구 하게 연구소 불 좀 꺼주세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연구에서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을 다해야 한다. 고3 수험생처럼 공부할 수 있는 것도 수능이라는 확실한 끝이 보이니 가능한 것이지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수험생처럼 공부할 수는 없다. 노자의 가르침대로 발끝으로 서 있는 사람은 오래 서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똑똑한 뇌가 불 꺼지지 않는 연구를 하다가 죽을 지경이 되지는 않도록 잘 관장해줄뿐더러 정말 끝이 보이면 막판 스퍼트를 하게 내버려둘 것이다.
김소영 객원논설위원·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