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 벌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 바다물처럼
푸른
가을
밤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고나
달빛에 젖어 호젓하고나
장만영 시인의 이 시는 ‘시건설’ 2호에 처음 발표되었던 작품이다. ‘시건설’은 1936년부터 등장했던, 그러니까 퍽 오래전에 발간된 시잡지이다. 특이하게도 평안북도 중강진이라는, 한국에서 가장 춥다는 북쪽 끝에서 꽤 오랫동안 나왔던 잡지이기도 하다. 오래되고 멀어서일까. 옛날 지면을 뒤적거리다가 장만영의 이 시를 만났을 때에는 심지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장만영이라는 시인의 젊었을 적 얼굴과 시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이 시에 뜨겁게 녹아 있는 듯했다.
맨 처음 잡지에 실린 원문은 오늘날 시선집에 실린 작품과는 몇 군데 다르다. 특히 2행이 다른데, 원문에서는 달빛이 ‘호수처럼’ 밀려왔다고 썼다. 그것을 추후 수정하여 오늘날 널리 알려진 시구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로 바뀌었다. 달빛이 호수가 되고, 그 호수가 다시 밀물이 되기까지 시인은 얼마나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을까. 생전 장만영 시인은 우리 한글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특히나 강조하고 소중히 했다. 시인은 역시 모국어 지킴이이며 언어의 장인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시를 통해 새삼 확인하게 된다.
장만영의 시구에 기대자면, 1937년의 가을밤은 동해 바닷물처럼 푸르고, 호젓하고, 향기로웠다고 한다. 올해의 가을밤이 장만영의 가을밤과 다르지 않기를, 시를 통해 꿈꿔 본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