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 30년]‘히로인’ 女탁구 복식金 현정화
1988년 서울올림픽 탁구 여자 복식에서 양영자와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건 ‘국민 탁구 스타’ 현정화 한국마사회 탁구팀 감독이 올해 서울올림픽 30주년을 맞아 마스코트인 호돌이 인형을 들고 당시의 감격을 추억하고 있다. 인천=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1988년 9월 30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체육관에서 열린 서울올림픽 탁구 여자 복식 결승전. 2.5g의 탁구공을 손에 쥐고 가녀리지만 쨍한 목소리로 기합을 넣던 19세의 어린 탁구 선수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현정화 한국마사회 탁구팀 감독(49)이다. ‘현정화표’ 화이팅은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알려진 ‘유행어’가 됐다. 그의 인기는 지금의 피겨 여왕 김연아에 버금갈 정도로 뜨거웠다. 현정화 효과로 동네 탁구장은 탁구를 배우려는 사람들로 북적였을 정도였다.
그는 서울올림픽 여자 복식 결승전에서 다섯 살 위 양영자와 함께 중국의 자오즈민-첸징 조를 꺾고 금메달을 따내며 세계 탁구 최고 자리에 올랐다.》
30년이 흐른 현재도 현정화는 여전히 탁구 테이블 주위에 머물러 있다. 바뀐 건 세월의 흐름에 맞게 국가대표 선수에서 실업 탁구팀 사령탑이 됐다는 것뿐이다.
“탁구장에서 보실까요.”
○ “영자 언니 덕에 서울올림픽 ‘현정화’가 있었죠”
이야기의 시작은 그가 서울올림픽 금메달을 따기 7년 전인 1981년 9월 30일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날은 독일 바덴바덴에서 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 발표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이후 종목별로 88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는 유망주 찾기가 시작됐다. 탁구에선 당시 국가대표 에이스였던 양영자를 도울 수 있는 후계자 발굴의 성격도 더해졌다. 탁구는 서울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정식 종목이 됐기에 의미가 남달랐다.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야했는데, 그 시기에 맞는 어린이 유망주를 찾던 중 제가 보였던 거죠. 남자는 유남규(현 삼성생명 여자탁구팀 감독)였고….”
현 감독은 1979년 초등학교 3학년 때 탁구를 시작해 계성여중 시절에는 이미 전국 대회를 석권하며 동년배 중에선 최고로 인정받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서울올림픽을 내 인생의 전부라 생각하고 지독하게 연습하고 치열하게 게임했던 것 같아요.”
이런 과정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탁구에 눈이 떠졌고 우리가 아는 현정화로 거듭났다. “언니 덕분에 제대로 탁구를 터득한 셈이죠. 특히 언니가 내가 잘 못하는 백핸드에 능숙한 것을 보면서 욕심 부리지 않고 내려놓는 ‘마인드’도 배웠어요. 그러면서 진정한 ‘현정화’가 완성된 것 같아요.”
그해 초 현 감독은 자신의 탁구 스타일을 바꿨다. 네트 앞에서 짧고 빠른 스윙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현 감독 특유의 공격적인 스타일이 완성됐다. “1985년에 탁구 스타일을 공격형으로 바꾼 건 힘없는 드라이브 선수로는 상대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전진 속공 플레이로 과감한 승부를 하는 스타일로 바꿨지요.”
○ “니들 뭐 하냐” 감독 호통에 정신 번쩍
“당시 여자 탁구 세계 1위 허즈리가 나올 것으로 봤어요.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려고 다른 선수들을 내세운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자기들 꾀에 넘어간 셈이 됐죠. 만약 첸징 대신 오른손잡이가 나왔다면 아마 힘들었을지 몰라요. 자오즈민 조는 발이 빠른 것도 아니고 왼손과 왼손 선수여서 ‘서로 움직이는 과정에서, 체력이 떨어지면 스텝이 꼬이겠다’고 예상했죠. 실제로 결승전에서 자오즈민이 넘어지기도 했어요.”
당시 현 감독은 랠리를 하는 동안 최대한 테이블 양쪽 구석 끝으로 번갈아 찌르는 전략을 썼다. “두 번은 상대의 포핸드 쪽으로 주고, 다음 한 번은 백핸드로 깊게 주면 우리 포핸드 쪽에서 기회가 날 것으로 예상했는데 맞아떨어졌어요.”
한국은 1세트를 21-19로 따냈지만 2세트에서 위기가 왔다.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약점이 있던 현 감독을 중국이 물고 늘어진 것. “상대가 공격할 때 수비를 하다 바로 공격으로 전환하는 게 부족했는데 중국이 이를 간파하면서 집요하게 공을 보내더군요.”
서브 리시브마저 다소 흔들렸다. 중국 선수들의 까다로운 스카이서브 구질에 대비해 리시브 적응 훈련을 많이 했지만 이날 2세트에서 첸징은 현 감독이 테이블에서 떨어져 어렵게 공을 받아내도록 변칙적으로 서브를 보냈다. “상대가 서브할 때 눈이 공을 따라가면 놓쳐요. 그것을 안 보고 공이 올 때 탁구공 마크가 안 보이면 회전이 많이 되고, 마크가 보이면 회전이 적은 구질이라는 것을 순식간에 구분해야 하죠. 이런 서브 받는 연습을 많이 했는데 2세트 때는 거리 조절을 하느라 집중력이 잠깐 떨어졌었죠.”
결국 2세트를 내주고 마지막 3세트가 시작되기 전 당시 이에리사 감독은 둘을 불러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감독님이 ‘니들 뭐 하냐’고 그러셨어요. 정신이 번쩍 나더군요. 공격을 안 하고 (수비로) 버티다 점수를 내줬다는 지적이었죠. 언니에게 ‘받기 바쁘게 공격합시다’라고 얘기했어요.”
이후 상황은 반전됐다. 한국이 3세트에 적극적인 선제공격을 펼치면서 중국을 앞서나간 것이다. “17-9로 앞서면서 속으로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가슴이 시원하더라고요. 그래도 언니한테는 ‘아직 안 끝났어요’라고 했죠. 올림픽 전에 중국에서는 ‘현정화를 잡아야 된다’고 했는데 ‘끝까지 안 잡힐 거다’, 그런 마음으로 마무리까지 밀어붙였죠.” 결국 경기는 세트 스코어 2-1로 한국팀의 승리로 끝났다.
○ 현정화에게 서울올림픽이란?
일반적으로 국가대표 선수들은 국제대회에서 얻은 메달, 트로피를 보물처럼 보관한다. 하지만 현 감독은 서울올림픽 금메달 당시 탁구 라켓, 유니폼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는 “박물관에 있을까?”라고 답했고 “서울올림픽 금메달은 갖고 있느냐”는 질문에도 “어디에 있을까요”라고 반문했다. 치열한 승부사지만 털털한 성격 탓이다.
현 감독은 자신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추억만으로도 만족한다고 했다. “당시엔 김연아보다 인기가 좋았죠.(웃음) 팬레터, 군사우편도 많이 오고, 특히 여학생들에게서 저를 보고 자신감을 얻었다는 편지를 받았던 기억이 많이 나요.”
현 감독은 서울올림픽이 ‘앳된 현정화’에서 ‘제대로 된 현정화’가 된 계기였다고 했다. “서울올림픽은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죠. 지기 싫어하고 욕심 많던 제가 파트너를 위해 공을 한 번 더 건져내고, 한발 더 뛰고 하는 것에 애착을 느낀 대회였거든요.”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파트너였던 지금의 남편을 처음 만나 사랑을 키운 것도 서울올림픽을 앞둔 시기여서 이래저래 1988년은 현 감독 인생의 하이라이트나 다름없다.
인터뷰를 마친 뒤에도 현 감독은 “천천히 기억을 좀 더 해 봐야겠다”며 서울올림픽 때의 숨은 에피소드를 되살리려 한참을 고민했다. 결국 그는 나중에 한 번 더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했다. 서울올림픽 40주년을 맞는 2028년, 현 감독이 공개하는 새로운 얘기가 또 나올지도 모르겠다.
인천=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