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서울올림픽 30돌]<1> ‘스포츠 강국’ 기폭제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88 서울 올림픽 우승 축하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고병훈 감독(왼쪽)이 이끈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동아일보DB
《 17일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 3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유치 단계부터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서울 올림픽은 모든 난관을 뚫고 가장 성공적인 대회로 기록되었습니다. 올해 한국은 평창 겨울올림픽 역시 성공적으로 치렀습니다. 이러한 성공의 저변에는 서울 올림픽의 유산이 깔려 있습니다. 서울 올림픽의 의미와 한국 스포츠의 방향을 살펴봅니다. 》
1986 아시아경기 3관왕이었던 육상 스타 임춘애는 “당시엔 나이가 어려 성화 봉송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성화가 무거워서 떨어뜨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최종 주자 임춘애가 넘긴 성화를 전남 소흑산도 분교 교사였던 정선만, 마라토너 김원탁, 서울예고 3학년이었던 손미정이 함께 이어 받아 성화대에 점화했다. 유치 단계부터 매 순간이 극적인 드라마와도 같았던 서울 올림픽이 본격 막을 올린 순간이었다.
이날부터 10월 2일까지 전 세계 160개국이 참가해 열전을 치른 서울 올림픽은 동서 화합의 상징적 무대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가장 성공적인 대회로 손꼽힌다. 한국 스포츠 활성화의 기폭제가 된 것은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 자신감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유도 김재엽, 탁구 현정화 유남규 등 645명의 선수단 명단을 새긴 가로 20m, 세로 5m 크기의 ‘영광의 벽’이 제막된다. 여기에는 박세직 당시 조직위원장을 비롯해 1488명 조직위원회 직원 전원의 이름이 새겨졌다. 자원봉사자 2만6000여 명의 활동에 대한 감사의 글귀도 적혀 있다.
서울 올림픽 유치 의견은 1979년 10월 초 박정희 정부에서 처음 나왔다. 박종규 당시 대한체육회장이 주도한 의견이었지만 크게 환영받진 못했다. 1981년 서울 올림픽 유치 당시 대한체육회 국제과장이었던 오지철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처음부터 올림픽 유치는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경쟁 상대는 일본의 나고야였다. 일본에 비해 국제적 인지도나 국력에서 한국이 크게 밀렸다. 한국은 이미 아시아경기를 유치했다가 반납한 사례도 있었다.
오 전 차관은 “한국 정부가 올림픽 유치 의사를 확실히 한 것은 올림픽 유치 결정을 불과 두 달 앞둔 1981년 7월경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유치 방침이 정해지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총력전이 벌어졌다. 정부는 물론이고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비롯해 많은 기업도 대거 참여해 힘을 보탰다. 한국은 IOC 위원의 개인 성향과 감성까지 파악하며 득표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서울 올림픽은 당시까지 사상 최다 참가국(160개국), 최대 참가인원(8456명)을 기록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동서 진영이 모두 참여한 올림픽이었다. 윤강로 국제스포츠외교연구원장(62)은 “서울 올림픽 다음 해에 독일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되면서 15개 독립 국가로 분리됐다. 서울 올림픽이 냉전을 종식시키는 데 가장 큰 디딤돌 역할을 한 셈이다”고 말했다.
IOC는 올해 초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서울 올림픽의 성공이 한국을 스포츠 강국의 반열에 올려놨다”고 홈페이지에 소개했다. 서울 올림픽 전까지 겨울·여름올림픽에서 메달 37개에 그친 한국은 그 후 올림픽에서 297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한국은 서울 올림픽 이후 치러진 7번의 대회에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12위)을 제외하면 매 대회 상위 10위 안에 들었다. 개최지 선정 이후 엘리트 스포츠 육성에 힘을 쏟은 영향이 컸다. 이연택 전 회장은 “체육부 주도로 전국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기초체력 측정을 통해 ‘88 꿈나무’를 발굴했다. 2000명이 넘는 유망주를 키워 아시아경기와 올림픽에 대비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유망주 발굴 정책의 성과로 한국은 1984 로스앤젤레스(LA) 대회에서 종합 10위(금 6, 은 6, 동메달 7개)에 올랐고, 1988 서울 대회에서는 금 12개로 종합 4위에 올랐다.
양궁 레슬링 유도 등 한국이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기록한 종목은 이후에도 ‘메달밭’ 노릇을 톡톡히 했다. 윤 원장은 “88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당시 기업 총수들도 경기단체 지원에 앞장섰다. 소위 ‘효자 종목’들은 이때의 지원이 밑거름이 돼 성장했다”고 말했다. 1984년 LA 대회부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한 번도 금메달을 놓치지 않은 양궁은 1983년 협회 창립부터 정몽준 당시 현대중공업 대표이사를 비롯한 현대그룹 일가가 회장직을 이어가며 지원했다. 레슬링은 이건희 삼성 회장이 협회장으로 재임했던 1982년부터 1997년까지 황금기를 맞았다.
조응형 기자 yesbr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