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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건 사회부장
사법부에도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 지난주 아수라장이 돼버린 박보영 전 대법관의 여수시법원 판사 첫 출근길에 ‘사법부가 적폐’라고 쓰인 피켓이 등장했다. 재판 거래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는 법원이나 국정농단 사건 등의 재판에서 법원이 유죄를 선고한 이명박, 박근혜 정부 인사들이나 마찬가지라는 비난이다.
피켓을 든 쌍용차 해고 노동자 등 30여 명은 출근하는 박 전 대법관에게 면담을 요구했다. 그가 대법관 재임 중 쌍용차 정리해고가 정당했다는 취지의 판결을 한 데 대한 항의였다. 법원 건물로 들어가다 경호인력과 취재진 등 인파에 휩쓸려 넘어진 그는 신변에 위협을 당할까 봐 일부 일정을 취소하고 일찍 귀가했다. 그는 집회 현장을 취재한 본보 기자에게 “법과 질서, 그리고 판결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며칠 뒤 쌍용차 노사는 해고 근로자 119명 전원 복직에 합의했다.
여기에 불을 붙인 건 법원의 자신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대거 기각이다. 서울중앙지법의 영장전담 부장판사 3명이 법원행정처와 관련자들에 대해 검찰이 청구한 영장 발부를 가뭄에 콩 나듯 하면서 ‘수사 방해’ 의혹까지 제기됐다. 전국의 로스쿨과 법과대학 교수 137명은 성명을 통해 “이런 상황에서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가 제대로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심히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법원을 비판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판단도 같아 보인다. 문 대통령은 지난주 ‘사법부 70주년 기념행사’에서 “의혹은 (중략) 사법부 스스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장 기각 문제의 법원 자체 해결까지 포괄해 주문한 것으로 해석된다. 검찰이 속한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사법부와 검찰 간에 얽힌 영장 문제를 직접 언급하는 게 부담스러워 에둘러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법원은 다른 사건들과 똑같은 잣대로 자신에 대한 영장 발부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는 자세에 변화가 없다. 정의롭고 공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는 본인만 정의로워서는 안 된다. 정의롭게 보여야 한다. 강일원 헌법재판관이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지금 법원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법원의 기반은 재판이 정의롭다는 국민의 믿음이다. 그게 흔들리면 결국 상도유치원처럼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그 몰락의 전조가 바로 박 전 대법관의 출근길, 청와대 국민청원 판결 불신, 교수들의 비판 성명이다. 이러다가 11년 전 판결에 불만을 품고 판사를 석궁으로 위협한 이른바 ‘석궁 테러’ 같은 사건까지 벌어질까 봐 걱정된다.
이명건 사회부장 gun4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