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서울올림픽 30돌]<2>세계적 모범사례 된 유산들
당시 대한체육회 국제과장이었던 오지철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69)은 “마치 시험을 보는 것같이 떨렸다”고 회상했다. 건설 현황판을 보며 묵묵히 설명을 듣던 IOC 관계자들은 올림픽공원 조성 계획을 듣자 엄지를 세워 보였다. “정말 멋진 계획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는 칭찬들이 쏟아졌다. 올림픽 유치에 대한 불확실성과 두려움이 자신감으로 바뀐 순간이다. 오 전 차관은 “경기장이 밀집된 공원을 올림픽이 끝난 뒤에도 시민들의 쉼터이자 생활체육의 공간으로 가꿔 나겠다는 계획에 IOC 관계자들이 ‘원더풀’이라고 말하는 등 큰 감명을 받은 모습이었다. 논밭이었던 부지에 마련한 ‘백년대계’가 그해 9월 올림픽 유치를 확정하는 기적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서울 올림픽공원은 독일 뮌헨 올림픽공원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오 전 차관은 “1980년 가을에 (1972년) 여름올림픽이 열렸던 뮌헨을 답사했다. 공원이 독일 남부 사람들이 여가를 즐기는 명소로 활용되는 것을 보고 우리도 공원을 짓고 그 안에 시설(경기장)을 만들자는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이런 세심한 계획에 맞춰 완공된 서울 올림픽공원 등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의 대표적 레거시(유산)다. 이 유산들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스포츠·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17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테니스경기장. 30년 전 올림픽 개막과 함께 성화가 활활 타올랐던 이날. 경기장에서는 국내 유일의 여자프로테니스(WTA)투어 대회인 2018 코리아오픈 테니스대회가 열렸다. 1986 서울 아시아경기, 서울 올림픽을 위해 건립된 이곳은 한국 테니스 발전의 요람 역할을 해왔다. 대한테니스협회 관계자는 “올림픽테니스경기장은 꾸준히 규모가 큰 국제 대회를 치러온 한국 테니스의 상징적 공간이다. 국가대표 선수들은 수도권 훈련 시 이 경기장을 활용한다”고 말했다.
테니스경기장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올림픽체조경기장이 있다. 이곳은 최근 리모델링을 거쳐 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KSPO 돔’이라는 새 이름도 얻었다. 8일에는 가수 인순이, 김경호 등이 출연한 서울 올림픽 30주년 기념 음악회가 열려 8500명의 시민으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KSPO 돔은 체조경기장의 역할도 병행한다. 시설 운영을 담당하는 한국체육산업개발 관계자는 “바닥 보강 공사를 진행해 내년 서울 전국체육대회 때 체조 경기가 체조경기장에서 열릴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울 올림픽에 사용된 경기장은 34개다. 이 중 20개는 기존 경기장을 보수해 사용했고, 14개가 신설됐다. 서울 올림픽공원에 위치한 경기장들은 테니스경기장처럼 꾸준히 스포츠 시설로 활용되거나 용도 변경을 통해 문화 공간의 역할을 해왔다.
사이클, 역도, 펜싱 경기장은 리모델링을 통해 새로운 역할을 수행했다. 올림픽벨로드롬(사이클)은 경륜장으로 바뀌었다가 2009년부터는 어린이 축구교실이 열리는 축구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펜싱경기장은 2011년 핸드볼 전용 경기장으로, 역도경기장은 2009년 뮤지컬 전문 공연장인 우리금융아트홀로 바뀌었다.
○ 한국 스포츠 젖줄 국민체육진흥공단의 탄생
○ 1988년 서울의 노하우와 2018년 평창
서울 올림픽은 30년 만에 한국에서 열린 올림픽인 2018 평창 겨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이끈 기반이 됐다. 평창올림픽조직위원회 관계자는 “서울 올림픽의 공무원을 활용한 대회 인력 운영과 경기장 완공 시기 등을 참고한 덕분에 역대 최대 규모(92개국·선수 2920명 참가)의 올림픽을 효율적으로 치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국민체육진흥공단은 평창 올림픽 경기장 건축 등에 사용되는 시설비로 1조822억 원을 지원해 재정적 도움을 줬다.
하지만 올림픽 유산의 성공적 활용을 보여준 서울 올림픽 경기장과 달리 평창 올림픽에 사용된 경기장(12개) 중 일부는 ‘애물단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 강릉하키센터, 알펜시아 슬라이딩센터는 여전히 사후 활용 방안이 정해지지 않았다. 가리왕산 환경 훼손을 두고 논란이 일었던 정선 알파인경기장의 경우 복원과 존치를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시설 실소유주인 강원도는 유지비 등의 명목으로 국비를 늘려 달라고 요청하고 있지만 정부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국비 지원 규모를 놓고 강원도와 견해차가 생기면서 사후 활용 방안의 확정이 늦어지고 있다. 강원도가 합리적 운영 방안에 대한 연구 용역을 진행 중이기 때문에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올림픽 유치와 운영에 힘을 보탰던 관계자들은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윤 원장은 “유지비를 걱정해 무조건 없애자고 하기보다는 최소 4년은 유지하면서 활용 방안을 찾아야 한다. 올림픽 공인 시설들인 만큼 2022년 베이징 겨울올림픽에 대비한 해외 팀의 전지 훈련지로 활용하거나, 국제 스포츠대회 유치를 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다면 평창도 훌륭한 올림픽 유산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정윤철 기자 trigg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