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처음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 DB
주성하 기자
이번 공연엔 예전과 달리 ‘중국장’이라고 불리는 한 개 장이 특별히 추가됐다. 이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겨냥한 서비스였을 것이다. 8월 25일만 해도 김정은은 시 주석의 9월 9일 방북을 확신했던 것 같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틀 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을 전격 취소하며 중국 책임론을 거론하자 시 주석의 방중은 무산됐다. 결국 리잔수(栗戰書)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이 9일 공연을 대신 봤다.
김정은은 매우 아쉬울 것 같다. 김정은이 올해 3월부터 6월까지 세 차례나 중국을 찾아가자 북한 엘리트층에선 ‘굴욕적’이란 여론이 돌았다. 그래서 김정은은 이번엔 시 주석을 어떻게든 데려와야 체면이 선다고 타산했을 것이다.
싱가포르 회담 뒤 김정은은 미국 중간선거 전에 트럼프 대통령을 평양 시민 수만 명의 떠나갈 듯한 환호 앞에 세울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비록 지난 몇 달 새 일이 좀 꼬였지만 만약 그 시나리오가 현실화됐다고 하면 시각적 메시지를 너무 좋아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며 트위터를 통해 얼마나 두고두고 자랑할 것인가.
김정은은 외교 성과뿐만 아니라 확실한 내부 선전 소재도 만들 수 있다.
지금 북한은 초급 당 비서 이상 당 간부들과 2급 이상 행정기관 책임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간부학습반 강연회에서 이런 선전을 하고 있다.
“트럼프는 푸틴이나 시진핑과 만나서도 강력한 악력으로 상대의 손을 잡아당긴 뒤 그 사진을 내돌리며 자신이 세다고 시위하는 ‘악수 외교’의 선수다. 하지만 이번엔 (김정은) 원수님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존경의 뜻을 표했다.”
“트럼프는 원수님보다 두 배 넘는 거리를 달려왔다. 너무 떨려 방에 박혀 회담 준비에만 몰두했지만 원수님은 하루 늦게 도착하고도 여유 있게 시내 관광까지 했다.”
중앙당 강사들은 슬쩍 “동무들한테만 해주는 말인데…”라며 강연 자료에도 없는 이런 말을 한다고 한다.
“회담 때 트럼프가 원수님에게 핵무기가 몇 개 있냐고 물었다. 원수님이 수령님 대에 수백 개, 장군님 대에 수백 개, 내가 만든 것까지 하면 1000개 정도 있다고 대답하자 그는 너무 놀라 입을 딱 벌리고 핵 폐기가 아니라 서로 공존하는 방향으로 회담 의제를 돌렸다.”
북한은 공식 강연에서 차마 낯 뜨거워 하기 힘든 얘기는 추가로 소문을 만들어 퍼뜨린다.
싱가포르에서 몇 시간 만나고 이 정도니, 미중 정상이 평양에 가면 어떤 위대한 김정은을 만들어 낼까. 전 세계 강대국 지도자들이 앞다퉈 장군님을 흠모해 달려온다고 선전할 게 뻔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방문도 당연히 좋은 선전 소재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평양에 가지 말랄 수도 없고, 북한 보고 사기 치지 말랄 수도 없고…. 씁쓸하다. 북한은 저렇게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까지 때는데…. 그 대신 우리는 실리라도 확실히 챙겼으면 좋겠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