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핵시설 리스트’ 대신 영변 카드… 진전 있지만 美 수용 미지수

입력 | 2018-09-20 03:00:00

[남북 9월 평양공동선언]비핵화
‘종전선언-영변폐기’ 맞교환 제시




“우리가 들고 간 내용들이 거의 다 합의된 것으로 보면 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19일 채택된 9월 평양공동선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북-미 대화 재개를 위해 제시한 중재안을 김정은이 상당 부분 받아들였다는 의미다.

하지만 김정은이 공동기자회견에서 “우리가 가는 앞길에는 생각 못했던 도전과 난관, 시련이 막아 나설 수 있다”고 밝힌 것처럼 북-미 비핵화 협상이라는 본게임의 성공을 낙관하기는 아직 어렵다는 평가도 여전하다.

○ 최소한 비핵화 조치 공개, 북-미 대화 동력 유지

6개 항목 14개 세부 합의로 구성된 9월 평양공동선언의 하이라이트는 비핵화 이행 방안을 합의한 마지막 항목이다. 공동선언은 이 항목에 △전문가 참관하에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 영구 폐기 △미국의 상응 조치 시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 등 추가적 조치 용의 △완전한 비핵화 추진 위해 남북 긴밀 협력 등 세 가지 합의를 담았다.

영변 핵시설 폐기는 판문점선언에서 ‘완전한 비핵화’를 합의한 김정은이 문서상 처음으로 밝힌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다. 북한은 그동안 핵무기 제조·생산과는 거리가 먼 풍계리 핵실험장 및 동창리 미사일 엔진시험장 폐쇄를 ‘선제적 조치’라고 강조하며 미국의 종전선언을 요구해왔다. 윤영찬 대통령국민소통수석은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기 의지를 밝힘으로써 북한 핵 불능화의 실천적 단계로 돌입했다”고 평가했다.

청와대는 미국 본토를 겨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용 엔진을 생산하는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 폐기에 전문가 참관을 허용한 것도 기존 입장에서 진전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과거 북측이 선제적으로 취한 비핵화 조치들이 보여주기식 폐기라는 국제사회의 불신을 해소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하지만 김정은이 공개한 카드는 핵시설 리스트 신고를 북한 비핵화 이행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는 미국의 요구에는 여전히 부족한 조치들이다. 특히 영변 핵시설은 북한이 폐기를 약속하고 원자로 냉각탑 ‘폭파 쇼’를 2008년 전 세계에 중계하고도 재가동한 시설. 김정은은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인 폐기’를 확인할 수 있는 사찰과 검증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 정교해진 살라미 전술로 종전선언 요구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기와 함께 “추가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면서 미국의 상응 조치를 요구했다. 김정은은 공동기자회견에서 비핵화 합의 대목 중 구체적인 이행 조치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조선반도를 핵무기도 핵위협도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 노력해 나가기로 확약했다”고 말했다.

사실 ‘핵무기도 핵위협도 없는 평화의 땅’은 북한의 비핵화와 정전협정을 대체할 북-미 평화협정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북한의 ‘행동 대 행동’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핵위협’을 없애기 위해선 미국과 불가침조약을 맺는 등 북-미 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이 때문에 김정은이 올해 내내 종전선언 등 미국의 상응 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갈수록 정교한 ‘살라미 전술’을 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면적인 비핵화 논의를 시작하는 대신 일부 핵시설 폐기와 이미 폐쇄 조치에 들어간 동창리 엔진시험장 사찰 수용 등으로 이행 조치를 잘게 쪼개면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선(先)비핵화 요구를 무력화하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 종전선언 채택 속도 올리는 靑

청와대는 평양 공동선언의 의미를 대대적으로 부각하고 나섰다. 문 대통령이 24일(현지 시간)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김정은과의 협의 결과를 전달하고 북-미 대화 재개를 제안할 예정인 가운데 이번에 어떻게든 종전선언 채택으로 이어가겠다는 복안이다. 윤영찬 수석은 “(비핵화는) 단계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영변 핵시설 불능화는 신규 핵물질을 생산한다든지, 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근원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의지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의미가 굉장히 크다”고 말했다. 이어 “두 정상은 이번 선언을 통해 1953년부터 지금까지 65년간 이어져온 한반도 정전 상태를 넘어 실질적 종전을 선언하고 그를 통해 조성된 평화를 바탕으로 공동번영으로 가는 구체적 실천방안을 제시했다”고 했다. 공동기자회견 직후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사실상 남북 간에 불가침 합의를 한 것”이라고 평가한 데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공동선언에 “남북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함께 긴밀히 협력해나가기로 했다”는 합의를 담은 것에도 의미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북-미 간 비핵화 대화에 한국이 협상 주체로 참여하는 것을 공식화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내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이 여전한 상황에서 한국이 종전선언 채택을 위해 지나치게 속도를 내면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하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