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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신광영]엘리트 법률가의 기민함, 어설픈 잡범들의 무모함

입력 | 2018-09-20 03:00:00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요즘 경찰에 잡히는 소매치기는 대부분 머리가 희끗한 60, 70대다. 현금 거래가 줄어 ‘밭’이 말라가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 달리 먹고살 기술이 없는 이들이다. 이 ‘원로’ 도둑들은 가끔 형사에게 세대교체가 안 된다는 한탄을 늘어놓는다. “요즘 것들은 헝그리 정신이 없어. 쉽게 훔치려고만 하고.”

범죄도 구조조정을 겪는다. 한때 유행하다 시대가 변하면 소멸한다. 1990년대에는 택시강도가 들끓었다. 경찰이 곳곳에 택시 검문소를 두고 강도가 탔는지 살필 정도였다. 널린 게 택시이고, 10만 원 남짓한 현금을 손쉽게 쥘 수 있어 진입장벽이 낮았다. 하지만 그만큼 쉽게 잡혔다. 타고 내린 곳이 특정되고, 지문을 남기며, 피해자이자 목격자인 택시 운전사가 거의 살아있어 용의자 인상착의가 금방 나왔다.

아파트 배관을 타는 ‘스파이더맨 도둑’들도 퇴장을 앞두고 있다. 단지 내 폐쇄회로(CC)TV가 늘어나고 고층화된 덕분이다. 배관을 타고 오르다 스스로 지치거나, 오르던 중 걸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도 애환을 토로한다. “이제 ‘3D 도둑질’로는 먹고살기 힘들어요.”

요즘 은행강도는 대표적인 ‘시대 부적응’ 범죄다. 저지르는 족족 잡힌다. 10일 충남 당진의 한 농협에 52세 여성 강도가 찾아왔다. 은행에서 500m 떨어진 고깃집 사장이었다. 장사가 안 되자 빚 9억 원을 갚으려고 일을 벌였다. 그는 양봉용 그물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자동 못총을 들었다. 범행 3시간 만에 인근 야산에서 만취 상태로 붙잡혔다.

돈을 향한 절박감 말고는 가진 게 없는 이들의 허접한 범행은 거의 백전백패다. 은행 직원을 포박하려 청테이프로 둘둘 감는다고 감았지만 금방 풀어지거나, 문구점에서 산 장난감 총으로 위협하다 들통이 난다. 종이비행기를 창구 안으로 날린 뒤 “비행기 주우러 간다”며 뛰어넘었다가 중심을 못 잡고 휘청대다 흉기를 뺏기기도 한다.

시골 은행에서 1억 원을 훔친 한 일용직 근로자는 전광석화의 속도로 오토바이와 승용차를 갈아타며 근처 대도시의 모텔로 숨었다. 그가 돈 가방과 함께한 시간은 4시간. 샤워 중 형사들을 만난 그는 “으악” 비명을 질렀고, 수사관에게 “도대체 나를 어떻게 찾았느냐”고 여러 번 물었다고 한다. 시골은 CCTV가 드물어 안 잡힐 것 같지만 한적할수록 몇 안 되는 CCTV에 특정되는 대상이 적어 골라내기가 쉽다.

어설픈 은행털이범이나 배관 도둑과 달리 ‘범죄 지능’이 높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처벌받을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기대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안다.

검찰이 18일 구속영장을 청구한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52)은 죄가 되는지를 떠나 적어도 범죄 지능 면에선 수준급이다.

유 전 수석연구관은 후배 연구관들이 만든 보고서 수만 건을 2월 퇴임 때 무단 반출했다. 대법원의 재판 개입 의혹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받는 자료들이다. 그는 검찰에 문건을 파기하지 않겠다고 서약하고도 법원이 자신의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한 틈을 타 문건을 모두 없앴다. 중대한 진실을 ‘절도’한 큰 잘못이지만 처벌받을 리스크는 낮다. 형사소송법상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없앤 행위는 증거인멸죄로 처벌하지 않는다.

반면 기대 이익은 무한하다. 본인으로선 공문서 반출 책임만 지면 될 뿐 사건 본류인 재판 거래 피의자가 될 가능성을 줄였다. 의혹에 연루된 다른 고위 법관들의 범죄 증거까지 없애줬다. 그는 25년간 판사로 일하며 차관급 법관(고등법원 부장)까지 지냈다. 궁지에 몰린 엘리트 법률가의 기민함 앞에 잡범들의 무모함이 새삼 초라해 보인다. ‘유식무죄 무식유죄(有識無罪 無識有罪)’라는 말이 떠오른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