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철 정치부 차장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법원 책임이다. 1세대 인권변호사이며 법조계에서 존경받는 원로인 한승헌 변호사는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법원이) ‘이 바람만 잠잠해지면 괜찮지 않나’ 생각하는 거 같다. 압수수색도 기각, 기각, 기각. 이렇게 하는 것은 도저히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법부라고 볼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한 변호사는 또 “치유하지 않으면 병균이 어디엔가 남아 있다가 또 머리를 들고 나올 것”이라며 법원의 앞날을 걱정했다.
한 변호사의 비판은 정확하다. 사법행정 농단 사건에 대한 수사가 시작된 지 3개월째지만 구속영장이 청구된 사람은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하며 수집한 재판 관련 자료를 유출했다가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파기한 유해용 변호사 한 사람뿐이다. 유 변호사가 10만 건가량으로 추정되는 재판 자료를 유출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큰 죄다. 하지만 재판거래 의혹 전체 그림에서 유 변호사는 ‘몸통’과는 거리가 먼 주변 인물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검찰은 부족한 증거와 진술만으로 관련자들을 기소해야 한다. 특검이 수사를 하더라도 법원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 결과 재판거래 의혹의 당사자들이 무죄를 받는다면 법원은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미 많은 사람들은 언론을 통해 보도된 재판거래 의혹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수도권 법원의 한 형사재판장은 기자와 통화에서 “사건 당사자들이 내 재판도 의심할까 겁이 난다”고 했다. 법원행정처가 일선 법원 재판 결과를 뒤집을 수 있고 그 과정에 거래가 개입할 수 있다는 불신이 퍼지는 건 위험한 일이다. 불신이 상식이 되면 재판 불복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법원을 더 이상 이런 상태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의혹이 사실이든 아니든 하루빨리 결론이 나야 한다.
법원이 스스로의 잘못을 고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국회가 나서야 한다. 국회는 법관에 대한 탄핵소추 권한을 갖고 있다. 문제가 된 법관들을 불러 헌법과 법률을 어긴 일이 있는지 따져 묻는 것은 국회의원이 해야 할 일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때처럼 국회 국정조사와 검찰 수사의 ‘투 트랙’을 가동하는 것은 현 상황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이번 사건 관련자들은 최고 수준의 법률가들이다. 국정조사가 열려도 방어권을 행사한다며 증언을 거부하거나 불출석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국정조사가 열리면 국민은 그들의 증언 또는 침묵의 행간에서 진실을 발견할 것이다. 또 ‘재판거래’ 의혹에 이름이 오른 이들 가운데 억울한 누군가에게는 좋은 명예회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전성철 정치부 차장 daw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