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화제의 서적 ‘플랜트 패러독스’ 주장 따져보니… 백미 대신 현미 먹던 사람들 건강에 나쁘다는 말에 당황 채소-과일 ‘렉틴’ 단백질 논란 주범… 책에선 “암 유발 등 만병의 근원” 전문가 “건강한 사람엔 문제 없어… 면역력 높이고 항암효과도 있어”
얼마 전 송 씨는 지인으로부터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현미가 백미보다 더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이다. 지인은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플랜트 패러독스’(사진)란 책에서 읽었다며 “건강식품이라고 믿는 것들이 오히려 몸에 더 좋지 않다고 한다”고 했다. 송 씨는 그 말을 믿어야 할지, 현미밥을 계속 먹어야 할지 고민 중이다.
50대 초반의 이모 씨는 매일 아침 잡곡을 갈아 만든 선식으로 식사를 대신한다. 1년 넘게 길들인 식습관이다. 잡곡을 많이 먹기 전에는 소화 불량 증세가 있었는데 이후로는 조금 개선된 것 같다고 느끼고 있다. 이 씨 또한 송 씨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잡곡이 몸에 좋지 않으니 흰쌀밥을 먹으라는 얘기를 친구로부터 들은 것이다.
○ 렉틴, 무조건 나쁠까
저자는 우리가 건강을 위해 즐겨 먹는 채소와 과일에 들어 있는 ‘렉틴’이라는 단백질이 만병의 근원이라 주장한다. 렉틴은 동물과 식물에서 모두 발견되는 단백질 복합체다. 특히 식물은 동물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렉틴을 만든다. 이 렉틴이 인체로 들어오면 염증을 유발하고 비만에서부터 암까지 모든 질병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렉틴은 현미, 옥수수, 콩, 밀, 보리, 땅콩, 곡물가루, 토마토, 오이, 호박, 멜론, 가지, 피망 등 대부분의 채소와 과일에 들어 있다. 특히 통으로 된 곡물에 많다. 따라서 껍질을 벗겨내고 먹어야 렉틴으로 인한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한다. 현미 대신 백미가 더 건강에 좋다는 주장이 여기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렉틴이 독성 성분으로 인체의 장내에서 염증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보통의 건강한 사람이라면 렉틴이 들어 있는 음식을 먹어도 위장에서 어느 정도 분해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입과 장 안에 있는 여러 미생물이 렉틴의 활동을 억제한다. 장벽이 튼튼하다면 렉틴은 쉽게 뚫지 못한다. 렉틴은 온도에도 약하다. 저자도 책에서 인정했듯이 물과 함께 익히거나 찌면 렉틴 농도는 크게 떨어진다. 최근 들어서는 렉틴이 면역력을 증대시키고 항암 작용을 하며 에이즈바이러스의 감염을 차단한다는 연구 결과도 속속 나오고 있다. 잘만 쓰면 독이 아니라 약이 된다는 뜻이다.
현미에는 분명 렉틴이 포함돼 있다. 이 때문에 껍질을 벗겨 백미로 먹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런 견해에 대해 국내의 영양전문가들은 대체로 동의하지 않는다. 일단 현미로 밥을 지을 때 렉틴의 농도가 크게 떨어지는 게 첫째 이유다.
게다가 현미에는 식이섬유와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이런 물질들은 지용성 화학물질과 중금속 같은 체내 독성물질과 붙어 대변을 통해 배출된다. 또 현미가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 수치를 낮춘다는 것은 이미 여러 연구로 입증돼 있다.
권오란 이화여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현미에 들어 있는 렉틴의 양은 미량에 불과하다. 보통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수준”이라며 “렉틴을 제거하기 위해 현미를 다 도정했을 때 잃는 것이 오히려 더 많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이어 “비타민도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몸에 해로울 수 있는데도 비타민을 먹지 말라고 하지는 않는다. 일부 단점만 부각해 현미가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덧붙였다.
의사들은 일반적으로 만성질환자에게 백미보다 현미 혹은 잡곡으로 된 밥을 더 권한다. 당뇨병 환자의 예를 들면, 열량은 쌀밥이나 잡곡밥, 현미밥, 보리밥이 모두 300Cal 내외로 비슷하다. 하지만 현미와 보리에는 백미에 없는 비타민, 무기질, 식이섬유가 풍부하다. 이런 물질들은 혈당이 올라가는 속도를 늦추고 혈액 속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다. 이연미 서울아산병원 영양팀 임상영양사는 “소화력이 떨어지거나 설사하는 환자에게는 흰쌀밥을 권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잡곡밥을 더 권한다”고 말했다.
플랜트 패러독스의 저자가 먹어서는 안 될 음식으로 정한 목록에는 건강 음식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꽤 많다. 이덕철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그 목록을 모두 피하고 식단을 차리려면 오히려 균형 잡힌 식단에서 멀어질 수 있다.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땅콩, 토마토 등은 요리 과정을 통해 렉틴 농도를 낮추기 어려운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먹지 않는 것보다는 먹었을 때 얻는 이점이 더 많으니 피할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김경수 서울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임상시험센터장)도 “렉틴과 관련한 임상시험 데이터를 찾아왔지만 인체에 치명적임을 입증하는 자료가 없다”며 “의학적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차연수 한국영양학회 회장도 “어느 특정 물질 때문에 몸에 좋은 성분을 제거해 식품을 섭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영양이 골고루 들어 있는 균형 잡힌 식사가 최고의 건강식이다”라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