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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생검사날… 藝妓 김향화, 동료 30여명 이끌고 “대한독립만세”

입력 | 2018-09-22 03:00:00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제16화> 수원-기생




조선 22대 왕 정조가 지은 수원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은 일제강점기 기생들의 위생검사를 실시하는 자혜의원으로 사용됐다. 수원 기생들은 궁궐을 훼손해 병원으로 사용하고, 전통 관기를 창기처럼 취급한 일제에 항거하는 뜻으로 이곳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사진은 복원된 봉수당 건물. 수원=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고향은 경성(서울), 1897년생, 본명은 순이(順伊), 10대 나이에 ‘향기로운 꽃’이란 이름으로 기적(妓籍)에 오른 수원 기생 김향화(金香花). 갸름한 얼굴에 주근깨가 운치를 더하고, 맵시 동동한 중등 키에, 성품은 순하고 귀염성이 있다. 검무·승무·정재무·가사·시조·경성잡가·서관소리·양금치기 등 기예에 막히는 것이 없는 데다 탁음이 섞인 듯한 애원성(哀怨聲)의 목청은 사람의 마음을 구슬프게 한다.(1918년 간행된 ‘조선미인보감’의 김향화 묘사)

3·1항쟁이 일어난 1919년, 스물두 살이던 김향화는 수원지역 요릿집에서 가장 즐겨 찾는 일등(1패) 예기(藝妓)였다. 당시 수원군 수원면 남수리의 수원예기조합(수원기생조합) 취체역(주식회사 이사)도 맡고 있었다. 수원 유지 및 지식층과의 교분으로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해 3월 독립만세운동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다. 25일자 ‘매일신보’ 3면에는 기생까지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생이 앞(장)서서 형세가 자못 불온’하다는 제하의 이 기사는 6일 전인 3월 19일 경남 진주에서 기생들이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6명이 체포됐으며, 그 후에도 진주는 여전히 불온한 기운이 가득하다는 내용을 담았다.

독립만세운동을 ‘불온한 소요사건’으로 몰아가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논조는 당시 읽는 이의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유일하게 한글로 발행된 신문지면의 행간을 통해서 세상사를 얼추 헤아려볼 순 있다.

진주 기생들이 펼친 운동의 실상은 이랬다. 진주읍 장날인 3월 18일 학생, 농민, 장꾼, 심지어 걸인들까지 나선 가운데 대규모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일제가 ‘기생독립단’이라고 표현한 진주 기생들이 시위에 동참해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악대를 선두로 한 기생독립단은 군중과 함께 남강 변두리를 둘러 논개의 자취가 남아 있는 촉석루를 향해 행진했다. 진주 기생들은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선배 의기(義妓) 논개의 애국충정을 본받고자 했다. “우리가 죽어도 나라가 독립이 되면 한이 없다”고 외치던 기생 6명은 일제에 검거됐다. 기생까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주는 독립에 대한 열망의 기운이 식을 줄 몰랐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

수원을 대표하던 기생인 김향화는 진주 기생들의 행동에 자부심과 함께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또한 기생이기 이전에 망국의 아픔을 함께하는 대한의 딸이었다. 독살 의혹이 난무한 고종의 성복(成服·상복을 입는 의례)날인 1월 27일, 그는 20여 명의 수원 기생과 함께 깃옷 소복 차림으로 나무 비녀를 머리에 꽂고, 짚신을 신은 채 경성으로 올라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통곡을 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수원에서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청년 학생들의 방화수류정 횃불시위(3월 1일)와 시장 상인 및 노동자들의 잇따른 만세운동이 모두 수원예기조합의 지척 거리에서 벌어졌다. 이를 모두 지켜봤던 그는 마침내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서도홍, 이금희, 손산홍 등 수원에서 활동하는 30여 명의 동료 기생이 그와 뜻을 같이했고, 즉시 독립만세를 외칠 때 쓸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준비에 나섰다.



○ 화성행궁에서 자행된 성병검사

거사 날은 3월 29일 토요일. 수원 기생들이 정기 위생검사를 받는 날이었다. 말이 정기검진이지 치부를 드러내고 성병 검사를 받는 치욕스러운 날이다. 일제는 의도적으로 조선시대의 전통적 관기(官妓) 신분이던 예기와 매음녀인 창기(娼妓)를 동일하게 취급하면서 공창제를 강행했다. 예기든 창기든 가리지 않고 기생조합에 가입했다면 정기적으로 위생검사를 거쳐야만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전통적 기생, 즉 예기들은 비록 천하게 대우받긴 했지만 관(官)에 소속된 신분이었다. 서울과 평양 등 전국 각지의 예기들이 고종의 승하를 애달파하며 예를 갖췄던 것도 스스로가 궁인(宮人)이라는 정체감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예기들은 예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학문을 겸비한 신여성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강압적이고도 비인간적인 위생검사를 받게 되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생들이 위생검사를 받는 자혜의원도 정조 임금이 지은 화성행궁의 정전(正殿)인 봉수당(奉壽堂)에 자리 잡고 있었다. 봉수당은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1795년 윤 2월 13일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른 유서 깊은 곳이다. 봉수당 진찬연에는 궁중 관기를 비롯해 화성부 소속의 지방 관기 13명이 참여해 잔치를 빛냈다. 화성부 지방 관기는 바로 김향화가 이사로 있는 수원예기조합의 ‘탯줄’ 같은 곳이며, 나라님이 머물던 화성행궁은 수원 기생들의 친정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의미가 담긴 화성행궁에 일제는 의도적으로 식민지 행정기구와 병원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조선을 짓밟았다.(이동근, ‘1910년대 기생의 존재양상과 3·1운동’)

이를 잘 알고 있던 김향화는 이곳을 독립만세운동 장소로 결정했다. 오전 11시 30분, 그는 30여 명의 기생을 이끌고 자혜의원 뜰 앞에서 준비한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의원 측이 내쫓자 이들은 멈추지 않고 바로 경찰서 앞으로 나아갔다.

병원 바로 앞에는 총검을 든 순사들이 지키고 있는 수원경찰서(화성행궁 북군영 터)가 위치했다. 당시 수원의 일경들은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바로 전날까지 수원면 곳곳에서 20∼30명 단위로 만세운동이 펼쳐진 데다 인근 사강리에서는 시위를 진압하러 간 수원경찰서 사법계 주임 노구치 고조(野口廣三) 순사부장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다가 시위대의 돌에 맞아 죽는 일까지 생겼기 때문이다.

수원 기생들은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던 수원경찰서 앞에서 대범하게 만세운동을 벌였다. 결국 그들은 무자비하게 진압됐다. 30여 명 중 19명은 10대의 앳된 소녀였다. 이들은 만세운동 뒤에 죽음의 공포와 끔찍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했다.

기자가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화성행궁을 찾은 9월 9일. 일요일 오전인데도 방문객들로 넘쳐났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행궁을 보려는 이들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기까지 무려 30분 이상을 꼼짝없이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수원 기생들이 만세를 부른 자혜의원(봉수당)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봉수당은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 장면을 연출한 무대로 꾸며져 있었다. 정조와 혜경궁 홍씨, 궁녀 등을 묘사한 밀랍인형이 당시 조선 왕실의 흥겨우면서도 진지한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서고 기생들이 만세운동을 했다는 흔적은 볼 수 없었다. 문화관광해설사는 정조와 화성행궁의 사연만 관람객들에게 설명해줄 뿐이었다. 기자가 만난 방문객 대부분은 이곳이 기생들의 만세운동 현장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서울에서 온 한 여성 방문객은 수원 기생들이 봉수당 앞에서 만세운동을 했다는 기자의 설명에 “그랬어요?”라며 놀라워했다. 그날 종일 기자의 머릿속엔 ‘스스로를 관기(官妓), 궁인(宮人)으로 자부한 수원 기생들의 독립만세운동 역시 역사에서 잊혀질 일은 결코 아니다. 화성행궁을 빛내줄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역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 사상기생

기생들은 노래와 춤을 공연하는 등의 영업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기생조합에 가입해야 했다. 사진은 서울의 한 기생조합 총회에 참석한 기생들의 모습이다. 동아일보DB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은 당시 수원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노래하고 춤추는 게 전부인 줄 알았던 기생들이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것 자체가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곱디고운 기생들이 일경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하며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됐다. 기생들이 체포된 날 밤, 300명의 학생 상인 노동자 등이 수원면(현 수원시내) 거리로 나왔다. 시위대는 기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수원경찰서 병력과 소방대원 등이 총출동해 진압에 나섰다. 시위는 밤늦게까지 격렬하게 이어졌고, 관공서와 민가 6채가 파괴되고 16명이 구속되며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튿날인 30일에도 거리 곳곳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경기도 장관은 “(이 날은) 수원 장날로서 일반으로 살기를 띠고 위험의 경향이 있으므로 보병 제 79연대로부터 병원(兵員)을 파견할 터”(‘경기도장관 보고서’)라고 할 정도로 수원 상황을 엄중하게 보고 있었다. 실제로 수원의 만세운동은 인근 면리로 확대됐고, 3·1항쟁의 최고 격전지로 이미 변해가는 중이었다.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은 이전 진주 기생들의 운동 방식과 달랐다. 진주 기생들이 지역민들의 만세운동에 합류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수원 기생들은 스스로가 판단하고 독자적으로 시위를 주도했다.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 후 전국 각지의 기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일이 잇따랐다.

3월 31일 경기도 안성에서는 변매화 등의 기생들이 만세운동을 선도해 1000여 명의 군중이 호응했다. 4월 1일 황해도 해주에서는 기생들이 독립만세 결사대를 조직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낸 피로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이끌었다. 4월 2일 경남 통영에서도 기생 만세운동이 치열하게 진행됐다. 기생 이소선과 정막래 등은 소복 차림으로 통영 시장거리에서 3000여 군중 시위에 앞장섰다.

한편 수원 만세운동 주동자로 체포된 김향화는 2개월여에 걸쳐 진행된 감금과 고문 끝에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 분국에서 재판을 받고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매일신보’는 그의 재판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보도했다.

수원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향화를 묘사한 ‘조선미인보감’. 2009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김향화의 훈장과 표창장(왼쪽 사진)은 후손이 밝혀지지 않아 현재까지 수원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수원박물관 제공 

이후 김향화는 경성의 서대문 감옥에서 유관순 등 여성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감방 생활을 하다가, 만기를 1개월 앞두고 가출옥했다. 수원 기생들의 독립운동을 연구해온 이동근 학예사(수원시청)는 “그가 형기를 다 채우기 전에 가석방된 것은 고문 같은 가혹 행위로 인해 수감 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상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그의 행적은 어디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정부는 2009년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훈·포장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의 훈·포장을 찾아갈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 현재 수원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일제는 김향화처럼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기생들을 ‘사상기생’이라고 불렀다. 3·1운동의 기운이 잦아들던 1919년 9월, 경성의 치안 책임자로 부임한 지바 료(千葉了)는 한국인 기생들을 만나보곤 혀를 내둘렀다.

“우리가 처음 부임하였을 때 경성(서울) 화류계는 술이나 마시고 춤이나 추고 놀아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800명의 기생은 화류계 여자라기보다는 독립투사였다. 기생들의 빨간 입술에서는 불꽃이 튀었고, 놀러 오는 조선 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사상을 불 지르고 있었다.”(‘朝鮮獨立運動秘話’)

실제로 당시 일본 경찰은 경성 시내 100여 곳의 요정을 ‘불온한 소굴’로 보았다. 지바 료는 “총독부가 아무리 좋은 정치를 하고, 군대와 경찰이 아무리 호령을 해도 사회의 이면에 불온한 소굴이 남아 있는 한 조선 사회의 치안 유지는 성공할 듯싶지 않다”고 한탄했다. 불온한 소굴의 주인공들인 기생들은 이미 각성한 신여성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셈이다.

수원=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