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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승헌]종전선언은 김치다

입력 | 2018-09-29 03:00:00


이승헌 정치부장

고향을 더 편하게 여기는 건 미국 사람도 매한가지인 듯했다.

뉴욕 유엔 총회 기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표정이 딱 그랬다. 뉴욕은 트럼프가 나고 자라 부동산 재벌에 대통령까지 된 곳이다. 24일(현지 시간)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직전엔 자신의 펜트하우스가 있는 트럼프타워에 들러 몇 시간을 보냈다.

워싱턴을 벗어나 편안해진 트럼프는 유엔 총회 기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2차 정상회담과 관련해 ‘예술 작품’(김정은 친서에 대한 평가) 등 온갖 상찬을 쏟아냈다. 딱 한 가지, 종전선언(declaration to end of war)만 빼고 말이다. 한창 ‘업’된 상태였을 텐데 종전선언 대목에선 정신을 차렸다는 얘기다.

트럼프는 문 대통령이 회담 내내 설득했을 종전선언을 왜 언급조차 하지 않았을까. 갖가지 분석이 나오지만 진짜 이유는 하나다. 김정은이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에 나설 것이라는 확신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전하는 김정은 말은 아직 못 믿겠다는 것이다. 이건 야당인 민주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미국 사람들을 만나 보면 정파를 떠나 자국 안보에 대해선 보수적이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지난해 김정은이 한창 미사일을 쏘아댈 때 대부분의 언론매체는 “북한 미사일이 미국에 닿을 수 있다”며 영토(territory)보단 흙(soil)이란 표현을 주로 사용했다. 땅 한 줌도 적에게 내줄 수 없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문 대통령의 뉴욕 방문 기간 중엔 폭스뉴스와의 인터뷰, 그중에서도 질문지를 통해 미국인들의 남북 정상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트럼프가 폭스뉴스를 유달리 편애해서 ‘보수꼴통’ 매체로 알려져 있지만, 문 대통령을 인터뷰한 브렛 바이어 기자는 폭스에선 상대적으로 균형감을 갖춘 언론인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질문은 △미국 일각에선 비핵화 조치가 이루어지기 전 너무 많은 것을 북한에 양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문 대통령이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건 통일인가 비핵화인가 △김정은은 어떤 인물인가 △문 대통령은 김정은을 신뢰하는가 등이었다. 나는 올해 비핵화 판이 벌어진 후 미국인들이 남북에 대해 궁금해하는 걸 이렇게 핵심만 추려 한데 모아놓은 걸 일찍이 보지 못했다.

트럼프의 종전선언에 대한 반응과 폭스뉴스 인터뷰를 보고 기자는 한 가지를 다시 한번 분명히 깨닫게 됐다. 남북미 종전선언으로 비핵화 논의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그 전에 미국이 이를 납득하고 관련 논의가 무르익을 만한 충분한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26일 회견에서 “비핵화까지 2년, 3년, 아니면 5개월이 걸리든 상관없다. 시간 싸움을 하지 않겠다”는 것도 시간표에 매달렸다간 제대로 된 비핵화가 어렵다는 걸 깨달은 결과가 아닐까 싶다.

문 대통령으로선 입술이 마를 수 있다. 간신히 복원시킨 북-미 대화 기조가 다시 언제 어떻게 뒤집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가급적 연내 종전선언 논의를 위한 시동만이라도 걸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뉴욕에서 내내 종전선언을 강조하고 다녔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6월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원샷’에 종전선언까지 내달리려 했다가 종전선언은 고사하고 북-미 비핵화 협상이 뒤틀어진 장면을 목격했다.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그럴수록 종전선언까지 내딛기 위해 트럼프와 김정은에게 시간을 줘야 한다. 수석협상가로서 북-미를 다시 붙여 놨으니 지금은 다시 북-미의 시간이다. 조급함을 가라앉히고 분위기가 잘 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