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헌 정치부장
뉴욕 유엔 총회 기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표정이 딱 그랬다. 뉴욕은 트럼프가 나고 자라 부동산 재벌에 대통령까지 된 곳이다. 24일(현지 시간)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직전엔 자신의 펜트하우스가 있는 트럼프타워에 들러 몇 시간을 보냈다.
워싱턴을 벗어나 편안해진 트럼프는 유엔 총회 기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2차 정상회담과 관련해 ‘예술 작품’(김정은 친서에 대한 평가) 등 온갖 상찬을 쏟아냈다. 딱 한 가지, 종전선언(declaration to end of war)만 빼고 말이다. 한창 ‘업’된 상태였을 텐데 종전선언 대목에선 정신을 차렸다는 얘기다.
실제로 미국 사람들을 만나 보면 정파를 떠나 자국 안보에 대해선 보수적이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지난해 김정은이 한창 미사일을 쏘아댈 때 대부분의 언론매체는 “북한 미사일이 미국에 닿을 수 있다”며 영토(territory)보단 흙(soil)이란 표현을 주로 사용했다. 땅 한 줌도 적에게 내줄 수 없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문 대통령의 뉴욕 방문 기간 중엔 폭스뉴스와의 인터뷰, 그중에서도 질문지를 통해 미국인들의 남북 정상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트럼프가 폭스뉴스를 유달리 편애해서 ‘보수꼴통’ 매체로 알려져 있지만, 문 대통령을 인터뷰한 브렛 바이어 기자는 폭스에선 상대적으로 균형감을 갖춘 언론인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질문은 △미국 일각에선 비핵화 조치가 이루어지기 전 너무 많은 것을 북한에 양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문 대통령이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건 통일인가 비핵화인가 △김정은은 어떤 인물인가 △문 대통령은 김정은을 신뢰하는가 등이었다. 나는 올해 비핵화 판이 벌어진 후 미국인들이 남북에 대해 궁금해하는 걸 이렇게 핵심만 추려 한데 모아놓은 걸 일찍이 보지 못했다.
트럼프의 종전선언에 대한 반응과 폭스뉴스 인터뷰를 보고 기자는 한 가지를 다시 한번 분명히 깨닫게 됐다. 남북미 종전선언으로 비핵화 논의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그 전에 미국이 이를 납득하고 관련 논의가 무르익을 만한 충분한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26일 회견에서 “비핵화까지 2년, 3년, 아니면 5개월이 걸리든 상관없다. 시간 싸움을 하지 않겠다”는 것도 시간표에 매달렸다간 제대로 된 비핵화가 어렵다는 걸 깨달은 결과가 아닐까 싶다.
문 대통령으로선 입술이 마를 수 있다. 간신히 복원시킨 북-미 대화 기조가 다시 언제 어떻게 뒤집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가급적 연내 종전선언 논의를 위한 시동만이라도 걸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뉴욕에서 내내 종전선언을 강조하고 다녔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6월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원샷’에 종전선언까지 내달리려 했다가 종전선언은 고사하고 북-미 비핵화 협상이 뒤틀어진 장면을 목격했다.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그럴수록 종전선언까지 내딛기 위해 트럼프와 김정은에게 시간을 줘야 한다. 수석협상가로서 북-미를 다시 붙여 놨으니 지금은 다시 북-미의 시간이다. 조급함을 가라앉히고 분위기가 잘 익기를 기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