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에 따라, 정권에 따라 수많은 통일론으로 혼란 거듭 여론 수렴하는 숙의 과정 거쳐 시들지 않는 ‘통일 정원’ 가꿔야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기시감(旣視感·D´ej‘a Vu).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1998년 금강산 관광을 시작하고 2000년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두 지도자가 뜨겁게 안았을 때도 그랬다. 그 포옹이 6·15남북공동선언으로 이어지면서 햇볕정책의 종착역인 평화가 손에 잡히는 듯했다. 하지만 참여정부가 대북송금 특검을 결정하면서 남북은 미지근해졌고, 스스로 설 기력도 없던 집권 마지막 해에 성사된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은 정신 승리만 남은 밀린 숙제가 되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도 통일을 말했지만, 이들의 통일은 북한 정권의 붕괴를 염두에 둔 흡수통일론의 성격이 강했다. 그럴수록 북한은 핵에 집착했고 우리의 전쟁 걱정은 더 깊어져 갔다. 지금부터 10년 후, 대통령 선거를 두 번 더 치른 후 우린 어떤 일상을 살고 있을까?
지난 20여 년간 극에서 극으로 변하는 남북관계를 떠올리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그래도 두 가지 교훈은 확실히 얻었다. 첫째, 주변 강대국이 아무리 간섭한들 우리 자신의 의지와 실천으로 통일로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시작이 좌초되지 않으려면 집권 정치 세력의 이념에 따라 달라지지 않고 환경적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우리만의 통일에 대한 확고한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 둘째, 우리만의 확고한 계획은 평화와 통일의 담론을 정치와 이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줘야 작성할 수 있다는 것. 유력 정치인이 자신의 통일론을 설파하고, 혹여 집권하면 이를 실천에 옮기지만 그 누구도 권불십년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것.
현 정부는 촛불정신을 계승하면서 에너지와 교육과 같은 중요 사안에 대해 공론조사라는 이름의 숙의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남북관계가 호전될수록 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결정의 순간이 곧 다가올 것이며, 이에 따라 논란도 격화될 것이다. 이 혼돈의 상황을 타개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장기적 관점에서 평화의 정착과 통일을 위한 공론화를 미리 시작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만 국제 정세의 변화와 국내 정치의 부침에도 흔들리지 않는 통일의 여정을 지속할 수 있다. 서독 헬무트 콜 총리가 1980년대 중반 당내 우파를 설득하면서 정적의 정책을 과감히 계승하는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일찌감치 전 국민적 숙의의 과정에서 국민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상시적인 공론화를 통해 통일로 가는 길이 한 번의 화려한 쇼가 아닌 예측 가능한 우리의 현실이 되었으면 한다.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