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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빛 진흙 기와 여전히 생생… 이곳은 ‘중세본색’

입력 | 2018-09-29 03:00:00

[조성하 여행 전문기자의 休]에스토니아 탈린




동쪽에서 바라다보이는 올드타운의 중세도시 모습. 한가운데 첨탑(69m)은 톰페아 언덕마루의 성모마리아 대성당이고 그 앞 첨탑(64m)은 옛 시청(15세기)에 부속한 것이다. 정면 아래 두 감시탑이 올드타운 정문 격인 ‘비루게이트’로 15세기 성벽의 방호시설이다. 비루게이트 안쪽이 올드타운이며 S자형의 저 길이 중앙로인 비루 스트리트다. 소코스솔로 탈린(호텔) 24층에서 촬영. 탈린(에스토니아)에서 summer@donga.com

《유럽의 허브는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 로마다. 거리(인천 기점)는 8256(프랑크푸르트)∼8946km(로마), 비행시간(보잉777 기준)은 9시간 15분∼10시간 3분. 그런데 더 가까운 곳이 있다. 핀에어 직항 헬싱키(핀란드)다. 반타공항(7032km)까지 7시간 53분. 가장 먼 로마 항로의 85%(70분 단축)다. 그러니 이용객이 늘어나는 건 당연. 하지만 아쉽다. 대부분 헬싱키를 스쳐 지나서다. 헬싱키는 북유럽 디자인의 수도. 마리메코, 이탈라 등 세계적인 디자인 브랜드의 고향이다. 게다가 두 시간 거리(여객선)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중세 타운의 탈린(에스토니아)이 있지 않은가. 이 두 도시 여행은 ‘스톱오버’(stopover·최종 목적지 항공편으로 갈아타기 전 헬싱키에서 최대 5일간 체류)로 즐긴다. 헬싱키↔탈린은 ‘탈링크’(Tallink·헬싱키 입출항 여객선사)가 있어 편하다. ‘스톱오버+탈링크’의 ‘헬싱키+탈린 짤막 여행’을 다녀와 소개한다.》

낮 12시 반. 메가스타호는 예정대로 헬싱키 남방 80km 탈린항(D터미널)에 정박했다. 이 두 시간의 배 여행. 특별했다. 배에 탄 사실을 잊고 지내서다. 정숙한 운항과 쇼핑몰에 온 듯한 착각이 핵심. 열두 갑판(12층)에 승객 2800명을 태우는 대형 여객선(길이 212m, 폭 30.6m)에선 진동조차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선실(2개 층)은 수십 개의 식당과 술집, 상점 그리고 라운지로 꾸며졌다. 라이브 연주를 들으며 맥주 홀짝이고 쇼핑에 열중하면 거기가 배란 걸 잊을 수밖에 없다.

13세기 중세부터 19세기 근대까지 700년 세월이 건축을 통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탈린 올드타운의 성벽 골목. 그 전체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재돼 보호를 받고 있다. summer@donga.com

그 바람에 중요한 걸 놓쳤다. ‘발트해의 보석’이란 탈린의 스카이라인 선상 감상이다. 그 찬사의 주역은 13∼17세기 한자동맹(Hansa League)의 상인과 선원이다. 북해와 발트해의 항구 간 결속체(최전성기 70여 개 도시 참가)였던 독일 주도의 이 동맹, 배타적 무역망이자 무력 사용도 불사하던 정치·군사동맹체였다. 탈린은 핵심 도시였고 축적된 부와 머물던 다국적·다종파 상인이 세운 교회 첨탑은 경쟁적으로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그게 탈린의 스카이라인이고 그 중세건축은 여전히 요새성벽과 공존한다.

탈린항은 서유럽과 러시아를 잇는 동서 무역 거점. 13세기 십자군전쟁기에 예루살렘의 관문 아코(이스라엘) 수호를 기치로 창단한 튜턴기사단(예루살렘 성모마리아의 독일형제회)이 탈린을 교화시킨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런 탈린에선 중세건축이 온전한 올드타운이 곧 역사. 한자동맹 도시에서 교회는 상인조합과 길드(장인공동체)의 활동 중심. 그 도시를 2.1km 성벽(최고 15m)으로 요새화한 건 축적된 부를 지킬 필요성의 산물이다. 그런 교회가 42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시대별 문화양식으로 그리스와 러시아정교회, 로마가톨릭, 루터교 등 신구 기독교의 다양한 종파가 앞다퉈 건축한 것이다. 그런 올드타운을 상징하는 색상은 주황빛. 중세건물 지붕의 진흙을 이겨 구운 기와에서 발산되는 중세본색(中世本色)이다.

올드타운의 타운홀 광장. 올드타운은 13세기 이후 역사가 이 돌길과 건축에 녹아들어 걷는 것 자체로 시간여행을 체험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summer@donga.com

에스토니아는 작다. 영토는 남한의 45%, 인구는 130만 명(이 중 25%가 탈린 거주). 지형은 평지(평균 고도 해발 50m 아래)로 가장 높아야 318m(서울 남산 271m). 수 km 두께 빙하로 덮였던 빙하기의 유산으로 5000년(간빙기)간 녹아내려 오른 수위로 국토는 잠식(해안선 1km 이상 후퇴)됐다. 그 바람에 바다엔 섬이 2222개 생겼고 땅엔 호수가 1400개 넘게 형성됐다. 풍화된 석회암 대지는 습윤한 기후로 늘 물에 젖어 흙 대신 이끼로 덮였다. 그 두께가 16m(5000년 치). 덕분에 나무가 잘 자라 국토 절반(51%)이 숲에 덮였다. ‘유럽의 아마존’으로 불리게 된 배경이다. 탈린 외곽(남쪽 10km)의 페스퀼라보그 숲은 울창한 송림. 땅바닥이 5m 두께 이끼라 쿵쿵 밟으니 푹신함이 느껴졌다. 얕은 개울 맑은 물의 수원은 샘. 목재가 한자동맹시대부터 주요 수출품이었으니 탈린에서 목제 기념품은 관심 둘 만하다.

탈린과 헬싱키는 ‘탈링크’(여객선사)로 인해 형제처럼 지낸다. 국가 교통망에서 본토와 섬을 잇는 뱃길은 ‘다리’ 개념이다. 그래서 민족, 언어, 국가가 달라도 두 도시는 하나처럼 벽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이달 9일(일요일) 탈린마라톤대회 출발선에서다. 국가가 연주되는데 핀란드 국가였다. 알고 보니 두 나라는 그 음률을 공유한다. 에스토니아 최대 규모 습지 수마(Soomaa)국립공원과 핀란드어의 핀란드 국명 수오미(Suomi), 핀란드 최대 호수 사이마(Saimaa)도 그렇다. 그 뜻이 모두 ‘젖은 땅’이다. 핀란드의 허다한 호수(18만7888개)와 섬(17만9584개)도 섬·호수의 나라 에스토니아와 마찬가지. 역시 빙하의 산물이다. 수돗물을 안심하고 마시는 것 역시 공통점인데, 두 나라 모두 물로 축복받았다.

물이 좋으면 발달하는 게 있다. 양조 과정에 병입량의 7배에 달하는 물을 쓰는 맥주다. 에스토니아라고 예외일까. 이곳 맥주 역시 오랜 역사로 정평이 났다. 1000년 이상 수출된 보리, 밀, 호밀(맥주와 위스키의 원료인 볏과 1년생 작물) 산지란 게 근거다. 양조 역사는 민족 기원과 동일시할 정도로 유구한데, 맥주를 뜻하는 ‘비루(Viru)’가 그 증거. 핀란드어로는 이 비루가 에스토니아를 지칭한다. 그건 고대국가 ‘비루마’(Virumaa·비루의 땅)에서 유래했는데 당시 주민 ‘비로니안(Vironian)’은 핀란드 민족인 핀(Finn)족의 일단. 두 나라는 언어(우랄알타이어족)도 조상도 한뿌리다. 올드타운의 중심 문 ‘비루게이트’(Viru Gates·14세기 축조된 요새 일부), 그 문을 지나는 올드타운 중심가의 비루 스트리트 모두 비루마에서 왔다. 맥주 비루도 거기서 왔으니 ‘민족=맥주’인 이곳이 맥주의 땅이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타르투(제2 도시)에서 양조되는 맥주 중엔 ‘비루(Viru)’란 브랜드까지 있다. 여기선 유럽에서 가장 깊은 곳 샘물로 만든다고 광고한다. 내가 묵던 소코스와 연결된 쌍둥이 호텔도 이름이 비루다.

음악, 그중에도 합창은 에스토니아의 전통이자 DNA다. 140년 역사의 최대 축제가 3만 명이 합창하는 ‘라울루피두(Laulupidu)’이고 소비에트연방(소련) 해체를 재촉한 ‘노래혁명’(Singing Revolution)이 라울루피두에서 발상한 게 그걸 웅변한다. 축제엔 해외 교민(인구의 10%)도 대거 찾는데 워낙 독특한 전통이다 보니 유네스코도 ‘사라질 위험이 높은 문화유산’에 등재시켰다. 노래혁명은 1990년 8월 23일 발트3국(북에서 남으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이 탈린을 중심으로 펼친 평화적인 반소비에트 시위. 세 나라 국민 200만 명은 양팔을 끼고 600km의 인간 띠를 만들며 합창으로 연방 해체와 재독립을 주창했다. 그리고 이듬해 모두 바라는 바를 이뤘다. 현대음악의 거장 아르보 파르트(83) 역시 많은 합창곡을 만들었다. 그는 그레고리오성가 연구를 통해 창안한 ‘틴티나불라’(tintinabula·종의 울림-연속되는 단음과 일정 템포 단순 리듬의 화성) 기법으로 현대음악사를 풍요롭게 한 작곡가다.

탈린(에스토니아)에서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여행 정보

에스토니아 유로화 사용 유럽연합(EU) 국가. 탈링크 승객은 출입국 검사 면제. 탈린에서 곧장 귀국하려면 예약(핀에어)할 때 탈린∼헬싱키(구간) 추가.

탈린 에스토니아 수도. 헬싱키∼탈린 여객선(80km 2시간 소요·하루 6회 왕복) 운항. 항공기는 30분 소요. 물가는 헬싱키에 비해 저렴한 편. 대개 2개 언어(에스토니아어, 러시아어)가 통용된다. 탈린 시내는 교통패스로 전차를 이용하는 게 편리하다. 올드타운의 비루게이트 앞 소코스호텔에 묵을 경우 24층 테라스에서 올드타운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인근 래디슨 블루스카이호텔의 ‘라운지24’는 야경 전망소. 올드타운의 전망대는 톰페아 언덕(고도 47m)에 두 곳. 주황색 지붕의 올드타운 전경이 발트해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유럽 최고(最古)약국 레아프테크(Raeapteek)는 올드타운 중심 타운홀 광장에 있다.

텔레스키비 폐허가 된 구소련 치하 공장(탈린역 앞)을 개보수해 식당 쇼핑센터 아트스튜디오로 활용 중인 지역. 휴일엔 벼룩시장이 선다. ‘텔레스키비 창조 도시(Teleskivi Creative City)’가 공식 명칭. ‘F-Hoone(에프호네)’는 그런 바람을 이끈 선도적인 레스토랑. 구소련 시대의 암울함이 여전한 공간에서도 안락감과 편안함을 제공한다. 실내디자인이 핀란드 못잖은 디자인 국가라는 칭찬이 과찬이 아님을 알게 한다. 음식도 훌륭하다. 비루게이트 앞에서 전차(1·2번)로 13분.

식당 ◇레이브 레스토랑: 올드타운 내 성벽 감시탑의 벽 밑 정원에 위치. ‘레이브(Leib)’는 에스토니아인이 즐겨 먹는 검은 빛깔의 호밀빵. 따끈할 때 소금버터와 함께 낸다. ◇파유빌라(Paju Villa): 페스퀼라보그 숲 부근의 고급주택을 개조한 식당. 소뺨 살(Beef Cheek)이 압권. 비루게이트에서 전차(18번)로 21분(택시 8km·11분). 페스퀼라보그에서 3.5km(택시 8분).

핀에어
유럽 최단거리 항로인 인천∼헬싱키를 매일 직항(8∼9시간 소요). 기내판매 면세품에 무민 캐릭터 및 마리메코, 이탈라 디자인 브랜드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