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분 산 인물에 ‘참교육’ 나서 … 신상 공개는 처벌될 수도
충북 진천의 한 도로변에 주차된 지프 레니게이드 차량. 차 외부에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왼쪽). 지프 레니게이드 차주의 폭언 피해자가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린 블랙박스 영상. [인스타그램 캡쳐, YouTube(병달TV) 캡쳐]
‘성지순례 다녀왔습니다.’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9월 둘째 주 내내 올라오던 게시글 제목이다. 이들이 말하는 성지는 충북 진천의 한 도로변에 빨간 지프 레니게이드 차량이 주차된 곳이다. 9월 첫 주 이 차량의 차주가 다른 사람에게 폭언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이 온라인에서 퍼졌다. 레니게이드 차량 차주가 명백히 잘못했는데도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모습이 누리꾼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공분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커뮤니티 사이트 이용자들이 영상 속의 레니게이드를 찾아내 차량 표지판 번호와 위치를 공개했다. 일부 이용자는 차량에 ‘그렇게 행동하지 마세요’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고 쓴 포스트잇을 붙이고 이 사진을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리기 시작했다. 사진이 퍼지는 속도만큼 빠르게 차 외부는 금방 포스트잇으로 뒤덮였다. 차주의 얼굴을 보겠다고 차량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까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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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다 같은 참교육
이 사건처럼 공분을 살 만한 행동이지만 법으로 해결이 애매하거나 피의자가 받은 처벌이 솜방망이 수준일 때, 소위 ‘누리꾼 자경단(Netizen?+?Vigilante)’이 나서왔다. 평소 체계적인 조직이 있는 게 아니라 사안에 따라 급조되지만 그 수사 실력과 행동력은 만만치 않다. 온라인상에서는 이들의 행동에 대해 ‘참교육’(비행을 저지른 사람에게 제대로 된 처벌을 내렸다는 의미), ‘사이다’(처벌 수위가 낮아 답답했던 마음이 해소됐다는 의미)라 하며 칭송한다. 하지만 법조인들은 이와 같은 자경단 활동이 위험하다고 말한다. 사법기관이 아닌 민간이 처벌을 가하는 ‘사적 제재’는 불법이다. 의로운 일을 하러 나섰다가 오히려 처벌을 받게 될 수 있다는 것.
현재 진천 레니게이드 차량의 위치는 불명이다. 차주가 차량을 옮긴 것. 이 순간을 포착한 누리꾼이 차량 커뮤니티 ‘보배드림’에 게시물을 남겼다.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은 차량이 이동하는 사진과 함께 ‘법적으로 막을 수단이 없다는 것이 참 마음이 아프네요. 다시 추적 들어가겠습니다’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 차량이 자경단의 집중 포화를 받게 된 것은 9월 6일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온 한 블랙박스 영상 때문이었다. 한 여성 운전자 A씨가 여섯 살, 네 살 아이를 태우고 아파트 진입로에 들어섰다. 진입로 앞에는 빨간 지프 레니게이드 차량이 정차돼 있다. 입구를 막아선 차에 경적을 울리자 운전자가 내려서 다가온다. A씨가 “들어갈 거예요”라고 말하자 다가온 차주는 “돌아서 들어가면 되잖아요”라고 존댓말로 응수하다 돌연 폭언을 퍼붓기 시작한다. “아까부터 빵빵거리는데 쪽바리 XXX가” “일본차 타고 다니면서” 등 여성 비하 발언 및 욕설을 퍼부었다. 일본을 운운한 것은 A씨가 탄 차량이 도요타의 캠리였기 때문. 레니게이드 운전자는 “대가리를 확~”이라며 협박까지 했다. A씨가 고소하겠다고 응수하자 고소하라며 소리를 지른다.
해당 영상은 처음 공개된 ‘보배드림’은 물론이고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 퍼져 누리꾼들의 공분을 샀다. 일부 누리꾼들은 전후 사정을 확인해보면 지프 차주가 화난 이유를 알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영상에서 지프 차주의 “아까부터 빵빵거리는데”라는 발언을 보면 영상이 촬영되기 이전에 기분이 상할 만한 부분이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사건 직전의 영상이 공개되자 조심하자는 여론은 사그라졌다. 추가로 공개된 영상에서는 A씨가 사거리에서 신호를 받고 출발하려고 할 때, 지프 차량이 신호를 무시한 채 우회전했다. 이를 본 A씨가 경적을 울렸다. 결국 지프 운전자의 온전한 잘못으로 판명 났고 이후 누리꾼들은 레니게이드 차량 인근에 천막을 세워 상황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일부 누리꾼은 인터넷 방송을 통해 차량 앞 대기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
○ 잘못 나섰다가는 피의자 될 수도
누리꾼 자경단이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과거에도 누리꾼들의 활약으로 사건이 빠르게 일단락된 경우가 있었다. 8월 인천 송도국제도시 캠리 사건도 누리꾼들 덕에 화제가 됐다. 8월 27일 인천 연수구 송도동의 한 아파트에서 B씨가 주차장 진입로를 자신의 차량인 캠리로 막아놓고 사라졌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입주민인 자신의 차에 불법주차 경고 스티커를 붙였다는 이유에서였다. 경찰 조사 결과, B씨가 캠리를 관리사무소에 등록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주차장 이용에 방해되자 주민 20여 명이 차량을 들어 옮겼다. 주민들은 B씨에게 사과와 차량 이동을 요구했으나 B씨는 묵묵부답이었다.
29일 차량 주위로 경계석과 화분이 놓였다. 몰래 차를 뺄 수 없게 하려는 방편이었다. 그 옆에는 ‘차주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을 표현해주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에 주민들은 차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포스트잇에는 “갑질 운전자님아 제발 개념 좀” “불법주차 안하무인”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사건이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를 거쳐 일파만파 커지자 8월 30일 해당 차주는 법적 대리인을 통해 입주자 대표에게 사과문을 제출했다. 이어 경찰에서도 일반 교통방해 혐의로 차주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사건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대부분 누리꾼 자경단 활동에 호의적이었다. 직장인 유모(32) 씨는 “그래도 누리꾼들에게 알려져 그나마 사과를 받았지, 그러지 않았다면 오히려 차주가 큰소리치며 차를 옮긴 주민들을 고소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자영업자 김모(43) 씨도 “자기 기분이 나쁘다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에게는 법적 제재보다는 이 같은 집단행동이 교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법조인들은 누리꾼들의 이러한 행동이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물의를 일으킨 인물의 신상을 커뮤니티 사이트 등에 공개하는 것이다. 일례로 음주운전 피의자 사적 제재 사건이 있다.
사실 이는 불법의 소지가 있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에 관한 법률 제49조에 따르면 누구든지 정보통신망에 타인의 정보를 도용, 누설해서는 안 된다. 이를 어길 시 5년 이하의 징역, 5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누리꾼들의 행동은 일종의 사적 제재에 해당하는데, 현행법상 사적 제재는 불법이다. 비양심적 행동을 했지만 법으로 처벌할 수 없거나 낮은 처벌을 받은 사람에게 창피를 주는 행동을 할 수 있지만, 가해자의 개인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법에 저촉된다. 더욱이 실수로 관련 없는 사람의 신상을 공개하는 경우 애먼 피해자가 나올 수도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진천 레니게이드 사건도 처음에는 전혀 관련 없는 차주의 차량과 신상이 공개되는 일이 있었다. 충북 진천에 빨간 레니게이드 차주가 2명이었는데 사건과 무관한 차주의 정보가 먼저 퍼진 것.
○ 합법적 기준 제시해줘야
지난해 9월 240번 버스 사건도 누리꾼 자경단 활동이 애먼 피해자를 만든 사례 중 하나다. 당시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서울 240번 버스 운전기사가, 어린이가 혼자 내린 것을 확인하고 뒷문을 열어달라는 아이 엄마의 요구를 무시했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글에는 ‘아이 엄마가 내려달라고 울부짖는데 기사가 욕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서울시에서 버스 내부 CCTV와 버스기사에 대한 조사를 거친 결과 이 글은 대부분 허위였다. 아이 어머니가 내려달라고는 했지만 기사는 이를 10초 정도 뒤에 인지했다. 이미 차가 교차로에 진입했으니 기사는 아이 어머니에게 “곧 다음 정류장이니 그곳에서 내려드리겠다”고 안내도 했다. 욕설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도로교통법상 정류장이 아닌 곳에 승객을 내리게 할 수는 없다. 이미 차가 교차로에 진입한 상황에서 내려주는 것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었다.
누리꾼들 사이에서도 자정의 움직임이 보인다. 누군가의 폭로성 글이 공개되면 가장 먼저 달리는 댓글은 이제 욕설이 아니라 ‘피카츄 배를 만지겠다’는 내용이다. 말 못하는 피카츄가 무작정 뛰어나가는 것을 막겠다는 함의가 들어 있다. 아직 사건의 진상이 정확히 드러나지 않았으니 우선 진상부터 파악하자는 것.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누리꾼 자경단의 활동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누리꾼 자경단 활동은 공권력이나 공적인 기구가 역량이나 법적 미비점으로 국민의 법 감정에 못 미치는 처벌을 내렸을 때 이를 보완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핍박하거나, 애먼 사람을 가해자로 모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법조계 관계자도 “포스트잇을 붙이는 것까지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차 앞에 대기하거나 차에 낙서하면 오히려 가해자가 될 수 있으니 자경단 활동에 나서더라도 항상 표현의 수위를 살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편 누리꾼 활동이 수사에 도움이 되는 일도 있다. 2015년 1월 충북 청주에서 발생한 뺑소니 사건의 범인도 누리꾼과 수사기관의 공조로 잡을 수 있었다. 화물기사로 일하던 강모 씨(당시 29세)가 귀가하던 도중 뺑소니 사고로 사망했다. 사고를 당했을 때 피해자는 크림빵을 사 들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임신한 부인이 먹고 싶어 한 케이크를 구하지 못해 크림빵을 대신 사 들고 들어오다 사고를 당한 것. 이 사실이 알려지며 ‘크림빵 아빠 뺑소니 사건’으로 알려졌다.
누리꾼들은 영상 분석으로 경찰을 도왔다. 경찰이 가해 차량으로 추정되는 영상이 담긴 CCTV를 공개했다. 누리꾼들은 영상 속 차량이 BMW5시리즈 차량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는 사건 해결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경찰이 처음 공개한 CCTV가 가해 차량과는 관련 없는 영상이었기 때문. 하지만 이후 청주시 공무원을 자처하는 한 누리꾼이 포털 사이트에 ‘우리도 도로변을 촬영하는 CCTV가 있다’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 때맞추어 경찰은 지자체의 CCTV 영상을 공개했다. 경찰은 영상을 통해 용의 차량을 특정했고 결국 범인 허모 씨의 자수를 이끌어냈다.
형사법 전문가인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행법상 사적 제재를 허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누리꾼 자경단의 활동은 사적 제재라기보다는 일종의 의사 표현으로 보인다. 처벌 정도가 너무 낮거나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시위로 창피를 주거나 질타하는 정도의 의사 표현은 허용돼야 한다. 단 무분별한 신상 공개나 재물 손괴, 명예훼손 등 범죄가 되는 부분을 확실히 구분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157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