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대통령, 폭스뉴스 인터뷰 발언… “대북제재 완화 다시 강화하면 그만” “훈련중단, 종전선언도 취소하면 그만” 외교에서 모멘텀 인식 부족 드러내면서 미국 향해 그 정도도 못하느냐 압박한 것
스탈린은 1952년 분할 점령 상태의 독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른바 ‘평화노트(Peace Note)’란 걸 제안한다. 독일과의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독일을 통일된 중립국으로 만들되 상호 군대를 철수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구의 지도자들은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북대서양 동맹을 통해 서독을 서구로 포섭하려는 모든 시도가 차질을 빚을 것이고 한번 차질을 빚자마자 다시 북대서양 동맹을 향한 모멘텀(momentum)을 되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거부했다.
송평인 논설위원
이 사건은 외교에서 모멘텀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그 모멘텀을 깨기 위해 외교의 상대방이 얼마나 집요하게 노력하는지를 보여주는 비근한 예일 뿐이다.
그의 ‘아니면 그만’이라는 발언에서는 외교에서 타이밍(timing)이나 모멘텀의 중요성에 대한 고려가 느껴지지 않는다. 유엔이 북한이 압박을 느낄 만한 대북제재의 모멘텀을 쌓는 데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미 중국과 러시아가 김정은의 말뿐인 비핵화 약속만 믿고 제재를 완화하기 위한 공세를 펴고 있다. 핵과 미사일 실험은 누가 봐도 명확한 도발인데도 대북제재의 모멘텀을 쌓는 데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다. 비핵화는 모든 군축 회담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기술적 문제로 변해 오리무중(五里霧中)이 되기 쉽다. 헨리 키신저 같은 외교학자는 군축은 극소수의 사람만 이해하는 난해한(esoteric)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1년, 3년이 아니라 더 긴 과정이 될지도 모를 비핵화를 놓고 제재를 강화할 모멘텀을 다시 쌓기는 쉽지 않다.
문 대통령의 말처럼 북한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중단된 군사훈련을 재개할 수도 있고 종전선언을 취소할 수도 있다.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중단된 군사훈련을 재개하고 종전선언을 취소할 경우 상황은 전과 똑같은 데로 돌아왔을 뿐인데도 큰소리를 칠 권리가 북한에 넘어가는 역전이 발생한다. 이런 것이 선후(先後)의 미묘함이다. 북한은 이 인터뷰 후에 ‘비핵화가 종전선언의 대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아니면 그만’인 종전선언 따위로는 비핵화의 대가가 될 수 없다는 논리가 그럴듯해졌다. 한 발 더 들어가서 따져보면 남북한 지도자가 ‘미국은 북한에는 불가역(不可逆)적인 것을 요구하면서 스스로는 종전선언 같은 가역적인 것도 못 해주는가’라는 인식을 공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문 대통령의 말이 단순한 수사로만 들리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같은 인터뷰에서 김정은을 솔직 담백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런 평가도 립서비스로만 들리지 않는다. 그가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고 확신한다는 근거는 김정은의 말뿐이다. 확신의 근거가 김정은의 말밖에 없기 때문에 김정은은 솔직 담백한 인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산주의자들은 말을 계산하고 하는 게 버릇이 된 사람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향한 립서비스에 흥분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생래적으로 압박을 받을 때만 움직이는 유형이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립서비스가 아니라 압박이다. 유화정책은 압박할 때보다 더 냉철한 현실주의에 토대를 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뮌헨 회담의 영국 체임벌린 총리처럼 기만에 농락당하는 우스운 꼴이 될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