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이진한 의학전문기자(가운데)가 최근 서울성모병원 가정의학과 신현화 전임의와 함께 치매와 고관절 골절로 거동이 불편한 이모 씨의 집을 찾아가 진료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의사가 직접 찾아와주니 정말 고맙고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네요.”
최근 기자가 의사로서 서울성모병원 가정의학과 신현화 전임의와 함께 치매와 고관절 골절로 거동이 불편한 이모 씨(92·여) 집에 왕진을 갔을 때 이 씨의 딸 기덕임 씨(61)는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는 게 정말 쉽지 않다”며 연신 감사함을 표했다. 왕진은 의사가 병원을 찾기 어려운 환자를 찾아가 진료하는 것을 말한다.
이 씨는 5년 전 치매 진단을 받고 치료제를 복용하는 상황에서 올해 1월 집에서 넘어져 고관절 골절 사고를 당했다. 만약 이 씨를 병원으로 모시려면 사설 앰뷸런스를 불러야 하는데, 병원까지 왕복 비용이 18만 원 이상 들어 치료비는 둘째 치고 교통비조차 감당하기 힘들다. 이뿐만이 아니다. 병원에 도착해 환자를 옮기려면 이동 침대가 필요하다. 작은 병원엔 갈 수조차 없다.
이렇게 이동이 쉽지 않은 환자의 고통을 줄이려면 왕진 제도가 활성화돼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일본에선 방문 진료가 활성화되면서 왕진이나 방문 진료를 전문적으로 하는 의원이 많아지고 있다. 일본은 정기적으로 주 1, 2회 환자 집을 방문하는 진료를 ‘방문 진료’, 환자의 요청에 따라 그때그때 환자의 집을 찾는 것을 ‘왕진’이라고 구분한다.
왕진이나 방문 진료 전문의원들은 보통 하루에 10∼15곳을 방문 진료한다. 또 환자가 급히 요청하면 찾아가는 ‘응급 왕진’ 서비스도 제공한다. 이를 위해 일본 보건당국은 주간, 야간, 심야, 휴일 등 방문시간 및 진료시간에 따라 수가를 달리 책정해 다양한 왕진 서비스가 이뤄지도록 지원하고 있다. 일본의 월평균 방문 진료는 70만 건, 왕진은 14만 건에 이른다. 연간 방문 진료와 왕진이 1000만 건을 넘고 있다.
지난달 우리나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선 왕진 수가의 근거를 마련한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국내에서 왕진이 정착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해당 법안은 환자나 보호자의 요청으로 의료진이 왕진을 한 경우 요양급여 비용을 가산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다.
최근 보건복지부와 대한병원협회, 대한의사협회, 대한개원의협의회 등 의료계 단체들은 간담회를 열어 왕진 필요성에 동의했다. 하지만 적정 수가를 두고 벌써부터 신경전이 치열하다. 의사협회는 왕진 수가가 7만∼9만 원, 교통비가 8000원 정도로 책정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오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당장 1차 의료기관인 동네의원과 대형병원의 왕진 대상은 다르다. 대형병원은 수술 후 환자나 말기 암 환자 관리가 주를 이룰 것이고, 동네의원은 만성질환자 관리가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다. 또 왕진이 활성화된다고 해도 왕진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고령 환자나 치매 환자의 경우 수시로 환자 상태를 살피는 게 중요하다. 왕진과 함께 가정간호가 중요한 셈이다.
가정방문 간호사 경력 14년 차인 최복순 간호사는 “일주일에 2, 3번 환자 집에 방문해 환자 상태를 살피고 환자의 말동무가 되어 드린다”며 “왕진을 통해 환자의 상태를 파악한 뒤 환자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려면 우리 같은 가정방문 간호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번에 왕진 제도를 구체화할 때 의사의 왕진뿐 아니라 가정방문 간호사의 활성화와 환자 전화상담의 활성화 등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 liked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