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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기홍]“내가 전쟁을 막아 수백만을 구했다”

입력 | 2018-10-04 03:00:00


이기홍 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줄곧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내가 한반도의 전쟁을 막았다. 수백만 명을 구했다”는 자화자찬이다. 싱가포르 회담 직후 비판론에 맞서 꺼내든 이래 수개월째 반복되는 그의 주장은 과연 팩트에 근거한 것일까.

트럼프는 “내가 취임할 때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방아쇠를 당겨 전쟁에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2009.1~2017.1) 핵심 인사들은 최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오바마는 여러 군사적 옵션들을 검토했지만 한국이 감수할 위험이 너무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반박했다. 워싱턴의 외교전문가도 필자에게 “미국은 어떤 안보 이슈든 대화부터 군사행동까지 모든 옵션을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하지만 그야말로 검토일 뿐 오바마 정부가 진지하게 군사행동 쪽으로 기운 적은 없다”고 말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기사검색 시스템인 카인즈(KINDS)에 ‘전쟁 북한 핵 미국 선제타격’을 검색어로 넣어봤다. 트럼프 당선일인 2016년 11월8일을 기점으로 그 이전 8년간은 256건이 떴는데 실제 전쟁 가능성을 우려하는 내용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트럼프 당선일부터 지난해 말까지 1년 1개월 여 사이에는 무려 706건이 쏟아졌다.

한반도의 전쟁 발발은 크게 두 경우를 예상할 수 있다. 즉 북한의 남침 또는 미국의 북핵시설 폭격이다. 그런데 북의 남침은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이 존재하는 한 현실화되기 어렵다. 미국의 북폭도 트럼프 취임 전에는 가능성이 사실상 제로였다.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나라인 미국이 자국민 수십만 명이 북한의 보복 포격 사정권내에 있고 미국 경제가 칡뿌리처럼 한국에 얽혀 있는 상태에서 전쟁을 강행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흔히들 빌 클린턴 행정부(1993.1~2001.1)가 1994년 북폭 하려 했다고 하지만 이는 다소 과장됐다. 필자는 1994년 당시 미 국방장관으로 영변 폭격 계획 주도자이며 책임자였던 윌리엄 페리 전 장관과 로버트 갈루치 북핵특사를 2006년, 2007년 세미나에서 만나거나 인터뷰했다. 요지는 1993년부터 수개월 동안 폭격 계획을 검토했고 전쟁 대비를 명령했지만 실제 실행을 결정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준비는 충분히 했지만 선호한 코스는 아니었고 결국은 채택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북폭이 임박해 주한 미 대사관이 미국인들을 다 소개(疏開)시키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해 김영삼 정부때 의전수석비서관과 통일원 차관을 지낸 김석우 씨는 최근 기고 등에서 “주한 미 대사관이 유사시 미군 가족을 소개시키기 위한 계획안을 일상적으로 점검하는 안내서를 외교안보수석이 입수해 김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박관용 전 국회의장도 “외교안보수석의 메모를 본 김 대통령이 다음 날 클린턴에게 전화해 전쟁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했다. 즉 클린턴 정부의 북폭론은 계획은 입안됐지만 여러 선택지 중의 하나였으며 한미간에 사전협의도 없었던 단계였던 것이다.

지난해 전쟁위기론은 김정은이 미사일 개발에 급피치를 올리는 상황에서 하필 미국 대통령이 트럼프라는 미 역사상 가장 불가예측한 인물이기 때문에 고조된 것이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포함한 제반 구조적 여건이 불가피하게 전쟁 쪽으로 기운 적은 없었다.

위기를 야기한 당사자가 자기 덕분에 위험이 없어졌다고 고마워하라고 하는 행태 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미국과 한국 모두에서 ‘전쟁 대(對) 평화’ 프레임이 과장되게 설정돼 비핵화라는 본질을 흐리는 현상이다.

‘현재 우리가 추진하는 것은 전쟁의 대체물로 선택한 것’이라는 프레임을 만들면 자신이 밀어붙이는 방향에 대한 비판을 ‘그럼 전쟁을 원하는 것이냐’고 몰아붙일 수 있게 된다. 과거 극우세력이 ‘적화냐, 안보냐’고 했던 것과 방향은 정반대지만 특성은 비슷한 프레임 짜기다.

물론 그렇게 해서 누가 정치적 이득을 보든 말든 중요한 건 비핵화의 실현이다. 그런데 트럼프가 “전쟁 망령을 새 평화로 대체하는 것”이라 하고, 문 대통령이 “남북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를 향해 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현 진행 방향은 북한이 미래 핵만 포기할 뿐 파키스탄처럼 수십 개의 핵폭탄을 은밀히 지닌 사실상의 핵 보유국을 향해 가는 궤도일 수도 있어 걱정된다.

김정은은 집권 후 5년 반 동안 4차례의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로 면전에 대고 도발하는 전략을 취해왔으나, 지난해 11월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뒤부터는 핵연료는 계속 생산하면서도 순한 양 같은 행보를 취하고 있다. 북한이 1990년대 후반 핵폭탄 제조 기술을 몰래 전수받은 파키스탄의 경우 1998년 6차례의 핵실험으로 수년간 엄청난 핵 포기 압력을 받았지만 그 뒤 조용히 지내왔고 어느 순간부터 누구도 특별히 문제를 삼지 않는다. 망토 속에 있는 것으로 확실시 되지만 확인은 하기 힘든 그런 ‘빽’을 지닌 채 경제에 매진하는 것, 그게 김정은이 노리는 길일 수 있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