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공화국엔 미래가 없다]<3>편의점 상비약 규제 6년째 제자리
《 누구나 한 번쯤은 약국이 문을 닫은 심야 시간이나 휴일에 갑자기 비상약이 필요해 안절부절못한 경험이 있다. 2012년 말부터 24시간 편의점에서 손쉽게 상비약을 구할 수 있어 이런 불편은 줄었다. 하지만 국내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의약품은 고작 13개. 판매 품목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6년째 달라지지 않고 있다. 》
2일 오후 경기 파주시 탄현면의 한 편의점에서 손님이 안전상비의약품을 구입하고 있다. 이 지역은 주변에 약국이 없어 편의점에서만 상비약을 구할 수 있다. 파주=원대연 기자 yeom72@donga.com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지역마다 약국이 잘 갖춰진 편이지만 약국이 없거나 약국이 문을 닫는 심야나 휴일에는 비상약을 구하기 힘든 곳이 적지 않다. 설령 편의점이 가까이 있다 해도 그곳에서 구입할 수 있는 약은 13개 품목에 불과하다. 늦은 밤 가벼운 상처가 나 치료를 하려 해도 무조건 병원을 찾아야 한다. 이 때문에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의약품 품목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정부는 약사회의 눈치만 살핀다는 지적이 나온다.
○ 병원 근처에만 다닥다닥 몰린 약국
이 때문에 이 지역 주민들에겐 동네 중심에 있는 24시간 편의점이 사실상 약국이다. 지금과 같은 환절기에는 감기약을, 농번기에는 파스를 이곳에서 구입한다. 심영식 축현2리 이장은 “편의점이 없을 때는 멀리 장보러 나갈 때마다 비상약을 한 움큼씩 사왔다”며 “급하게 소화제나 진통제가 필요할 때 편의점이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탄현면에 위치한 산업단지 내에도 약국이 없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탄현일반산업단지의 경우 약국이 3.5km가량 떨어져 있어 산업단지 입구에 있는 편의점이 유일하게 비상약을 구할 수 있는 곳이다.
○ 편의점 판매 의약품 확대 요구 높아
정부는 2012년 말 일반의약품을 편의점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편의점 안전상비의약품 공급액은 2013년 153억 원에서 2015년 235억 원, 지난해 329억 원으로 4년 만에 2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늦은 밤뿐 아니라 직장인들의 출퇴근시간에 문을 열지 않는 약국이 많아 편의점에서 약을 구입하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국민 편리를 위해서는 편의점에서 파는 약 종류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올해 8월 174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6.8%가 ‘안전상비의약품 품목을 지금보다 늘려야 한다’고 답했다. 편의점에서 판매했으면 하는 품목은 제산제(위산 과다증이나 위궤양 치료제), 지사제(설사약), 포비돈액(소독약), 화상연고 순이었다.
○ 약사회 반발에 손놓은 정부
보건복지부는 2012년 편의점 상비약 제도를 시행하며 “소비자들의 약 사용 실태를 점검해 시행 1년 뒤 품목을 조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1년 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실태 연구 보고서를 내놓은 것 외에 3년 넘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016년 7월 정부 합동 ‘서비스경제발전전략’ 회의에서 안전상비약 규제가 과도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그제야 품목 조정을 시작했다.
정부는 2017년 3월 △대한의학회(2명) △대한약학회(2명) △시민사회단체(2명) △보건사회연구원(1명) △언론(1명) △대한약사회(1명) △편의점산업협회(1명) 등 총 10명이 참여하는 ‘안전상비의약품 지정심의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상비약 품목 조정에 따른 사회적 갈등을 줄이고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다.
약사회는 이미 편의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타이레놀을 두고 “위험성이 크다”는 이유로 제외할 것을 요구하는 등 위원회 차원에서 합의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신현호 변호사(시민사회단체 몫)는 “상비약 품목 확대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고시를 통해 추진하면 되는 사안”이라며 “더 이상 위원회에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지금이라도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상비약 품목 조정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위원회 뒤로 숨지 말라는 얘기다. 하지만 복지부 관계자는 “올해 안에 위원회가 원만히 합의를 해주리라 기대한다”고 밝혔다.
파주=김철중 기자 tnf@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