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극인 산업1부장
비극은 딱 10년 후 2008년 금융위기 때 되풀이됐다. 대학생들 사이에 1년 휴학이 필수였던 시절이었다. 유행처럼 번진 스펙 경쟁 때문이었다. 기업 인턴을 해야 했고, 해외 어학연수에 해외 봉사활동도 해야 했다. 서울 명문 사립대 04학번 K 씨(여)도 이들 중 하나였다. 휴학으로 졸업이 늦춰졌지만 단단히 준비했던 만큼 2008년 연말 취업시장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그해 9월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시작된 금융위기가 꿈을 앗아갔다.
외환위기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기업들은 신입 채용부터 줄였다. 거푸 고배를 마신 K 씨는 공무원과 공기업 시험 준비에 나섰지만 치솟은 경쟁률을 뚫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나이는 늘었고, 고향 부모님께 손 벌리기도 민망해졌다. 꿈을 줄여 작은 기업들에 도전했지만 이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서류전형에서 다 떨어졌다. “열심히 안 산 것도 아니고 스펙 쌓느라 졸업 늦춘 죄밖에 없는데, 인생이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서른을 넘긴 지금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K 씨의 넋두리다.
일본에서는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된 1990년대 초반 사회에 첫발을 디딘 세대를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잃어버린 세대)’이라고 한다. 선배들이 당연한 듯 올라탔던 버스 문이 눈앞에서 닫혔다. 파견사원과 아르바이트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부모에게 얹혀사는 캥거루족, 은둔형 외톨이인 히키코모리, 일도 안 하고 의지도 없는 니트족 등의 용어가 생겨났다. 때를 잘못 만난 죄였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은 원래 1920년대 파리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 거트루드 스타인이 ‘당신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다(You are all a lost generation)’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청년기를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에 유린당한 절망의 세대, 전쟁의 참상을 겪으면서 기존 가치관을 냉소하며 방황한 상실의 세대를 일컬었다. 지금은 전쟁이 취업 실패로 단어만 바뀌었을 뿐이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은 사회 전체의 비극이다. 가족과 국가의 부담 또한 말할 나위 없다. “내년이면 성과를 낼 것”이라는 한가로운 말로 때울 문제가 아니다. 다행히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주 SK하이닉스 반도체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기존 일자리 정책의 한계를 인정하고,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결국 기업”이라며 노선 전환을 시사했다. 내친김에 이념과 진영논리에 갇혀 있는 각종 노동·규제법안을 재검토하는 후속 조치도 기대한다. 민관이 합심해 10년 주기설은 틀렸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배극인 산업1부장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