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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선 시인 “시가 난해한 만큼 독자와 만나는데 더 큰 소통의 기쁨 느껴요”

입력 | 2018-10-11 03:00:00

[21세기 청년 작가들]<16>長詩가 돋보이는 백은선 시인




백은선 시인은 “시란 내게 천사이면서 악마이고 나를 망치려는 구원자”라며 “시를 쓸 때는 뭘 해도 느낄 수 없던 감정의 격동을 느낀다. 가장 절망하면서 가장 큰 환희를 경험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이게 끝이면 좋겠다 끝장났으면 좋겠다’로 시작하는 시는 10페이지 넘게 계속된다. ‘가능세계’에선 이런 긴 시편들이 종종 눈에 띈다. 시인 백은선 씨(31)는 이 첫 시집으로 지난해 소설가 최은영 씨와 함께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했다.

“제 시가 볼륨이 커서 쓰는 데 오래 걸려요. 최근에 마감한 작품은 원고지 60장 정도인데 6개월 걸렸어요.” 8일 만난 백 씨는 ‘시집 가격은 같은데 책이 두툼해 가성비가 있을 것 같아 구매했다’는 독자평도 있었다며 웃었다. “끝없이 지속되는 무력감이 우리 시대의 젊은 세대가 공유하는 소진(消盡)의 정서와 유사하다”(평론가 조연정)는 평을 받은 그이다.

어떻게 문학의 길을 선택하게 됐느냐고 묻자 그는 “반지하 원룸에서 가족이 함께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난 앞으로 뭐가 될까 하다,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중학생 시절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나 집과 재산이 압류되고 경매로 넘어갔을 때였다. 교육열 뜨거운 서울 목동 아파트에 살면서 학원을 7개씩 다니던 그는 하루아침에 ‘방치된 청소년’이 됐다. 그림을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등 표현 행위를 좋아했던 그는 “글쓰기는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되니까 가난해도 할 수 있는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했다”고 돌아봤다. 패스트푸드점의 주부사원이었던 어머니를 따라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교 시절을 보내는 동안 닥치는 대로 글을 썼고,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지 2년여 만에 시인이 됐다.

최근 수년 새 한국문단을 흔든 이슈는 페미니즘이다. 백 씨 역시 “앞선 세기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여성을 쉽게 대상화하거나 소모적으로 소비하는 대목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21세기 문학이 지난 세기와 다른 지점을 묻자 “이런 문제의식을 놓고 고민하면서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것, 모럴의식에 민감하며 실제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앞선 세기와 구별되는 부분”이라고 밝혔다.

‘무의미의 사전’이라고도 불릴 만큼 난해한 시를 쓰기에 백 씨는 얼핏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가 진행하는 ‘선물하는 시’ 프로젝트를 소개할 때 목소리에 활기가 돌았다. “시를 인쇄해 시장에 가서 상인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록 페스티벌에 참여해 시를 읽어주기도 합니다. 시 전시회에 참여한 관람객을 위해 동료 시인들이 즉흥시를 써주고 저는 그림을 그려줘요.” 독자와 대면할 수 있는 그 시간에 “소통의 기쁨을 느낀다”고 시인은 의미를 부여했다.

새로운 세기 문학의 역할을 묻자 백 씨는 벚나무 얘기를 했다. 눈 쌓인 모습부터 벚꽃이 만개한 나무, 초록이 무성해지는 장면까지 그는 올 들어 매일 같은 나무의 사진을 찍었다. 그저께와 어제, 오늘 변화가 없어 보이던 그 나무는 한두 달씩 지나 보니 전혀 달랐다. “문학은 무용(無用)하고 아름다울 뿐”이라면서도 “아름답고 슬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던 시인은 이렇게 덧붙였다. “매일 비슷해 보이는 것 같지만 세밀하고 정교하게 들여다볼 때 열리는 다른 풍경이 있습니다. 제가 사진 찍은 벚나무처럼. 그 다름을 포착해서 보여주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