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서울대 명예교수
양손에 가방을 끌며 걸음을 떼는 순간 누군가와 부딪힙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이 나왔습니다. 그 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경직된 초자아(超自我)의 표현입니다. 키가 큰 젊은 남자가 가는 척하다가 말을 겁니다. “일본 사람?” 무조건 무시하고 내 갈 길을 갔어야 했습니다. 불편해진 마음에 또 쓸데없이 “한국 사람!”이라고 대응합니다. 남자는 결국 내게 가까이 옵니다. “한국, 축구!” 하며 공을 차는 시늉을 합니다. 아, 자랑스럽습니다. 그 순간 남자의 오른팔이 두 손에 모두 가방을 끌고 있는 제 어깨를 친근하게(?) 감쌉니다. 그리고 그의 발이 점점 세게 제 발을 찹니다. 제 시선은 고개를 숙여 발로 향합니다. 옷과 몸 사이의 간격이 벌어졌을 겁니다. 취한 듯, 최면에 걸린 듯 아주 잠시. 호텔 바로 앞을 남자가 유쾌하게 춤추듯이 걸어서 사라집니다. 돌아보며 인사도 합니다. 피곤이 몰려옵니다. 짐을 끌고 들어와 체크인 장소에 서는 순간 뭔가 허전합니다. 윗옷 오른쪽 주머니의 지갑이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남자는 이미 보이지 않습니다.
분노, 좌절, 실망, 추락된 자존감이 밤새 저를 괴롭혔습니다. 조심하라고 미리 들었습니다. 알고도 당했습니다. 눈 뜨고 겪었습니다. 서울의 잠든 가족을 깨워 신용카드는 정지시켰지만 운전면허증과 돈은 사라졌습니다. 미리 숙박비 전액을 지불하지 않았다면 길거리에 서 있었을 겁니다. 초청한 교수의 도움이 없었다면 도난 신고도 못 했을 겁니다. 다음 날 찾아간 경찰서는 알려진 자리가 아닌, 건물 지하에 거의 숨어 있었습니다. 경황이 없는 중에도, 디자인 강국이어서인지 경찰 복장도, 경찰관 아저씨도 멋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서류 작성에 세 시간이 걸렸습니다. 같은 질문을 왜 반복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기억력이 나쁜가? 아니면 답변의 신뢰도를 평가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아마 후자일 겁니다. 끝나고 물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조치가 취해지나요? 작성된 서류를 담당 구역으로 넘긴다고 합니다. 결론은? 시간과 에너지를 써서 이 화려한 도시의 소매치기 통곗값 산출에 공헌했다고 봅니다.
억울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다스리려고 애 썼습니다. 보상을 받고 싶었습니다. 왜 이곳 경찰은 호텔 폐쇄회로(CC)TV에 다 찍혀 있을 소매치기를 빨리 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 왜 호텔은 CCTV 화면을 경찰에게 먼저 제공할 뜻이 없나? 왜 이 나라는 이런 식으로 내 환상을 깨는 것인가? ‘문화 대국’의 평판이 나빠진다면 제게도 박수 칠 일은 아닙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프랑스 파리에서 장마르탱 샤르코가 히스테리 환자에게 하는 최면 시술을 직접 보고 히스테리가 뇌가 아닌 마음의 문제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경험이 정신분석학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습니다. 필리프 피넬은 오랜 세월 쇠사슬에 묶여 갇혀 지내던 정신질환자들을 풀어주고 인간적으로 치료해주어서 근대 정신의학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이 두 가지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이 어디였을까요? 바로 파리에 있는 살페트리에르 병원입니다. 저는 이번에 처음으로 그들의 발자취를 현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파리에 있는 ‘유대인 예술과 역사 박물관’에서 ‘프로이트 특별전’이 열렸습니다. 아담한 건물에 기껏 수십 명이 모이리라 짐작하며 초대장을 들고 개막일에 갔습니다. 밤 시간에 전철을 갈아타며 찾아갔습니다. 아주 큰 고풍스러운 건물의 가운데 마당에 수백 명이 모였습니다. 몸을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성황이었습니다. 의학의 영역 밖인 사회문화적인 영향권에서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특별한 경험만으로도 힘들게 시작한 제 여행은 보상받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여러분, 소매치기 조심하시길!
정도언 정신분석학자·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