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세쯤 됐나. 결혼한 뒤 애들 키우기에 정신이 없는데 몸에 이상이 왔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여성 질환이 찾아왔다. 친구가 운동을 같이 하자고 해 주변 에어로빅학원에 등록했다. 그런데 에어로빅은 내 스타일에 맞지 않았다. 한 2년 뒤 수영을 시작했다. 그 때부터 내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운동이라곤 해보지 않았는데 수영은 몸에 딱 맞는 옷 같았다. 수영 자체가 재미있었고 하는 대로 실력이 향상됐다.
수영 강사를 하면서도 각종 대회를 휩쓸었다. 매일 피트니스와 수영을 하고 있던 2009년 마라톤이 찾아왔다. 그해 인천대교가 개통했고 그를 기념해 마라톤대회가 열렸다.
11일 인천 계양 계산국민체육센터에서 달리고 있는 박정순 씨.
하프코스 첫 도전에 1시간 41분에 완주. 헬스와 수영으로 다져진 몸이지만 한번도 긴 거리를 달려보지 않은 상태에서 세운 기록으론 수준급이었다. 이듬해 새롭게 막이 오른 인천송도국제마라톤에서 처음 풀코스에 도전했다.
“3시간36분대 기록으로 상위권에 올라 상금 20만 원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한 턱 내라’는 주변 사람들의 요청에 더 많은 돈을 썼지만 아주 기분 좋은 추억이었다.”
올해의 경우 5월 2018 불수사도북 45km에서 8시간54분으로 여자부 우승을 차지했다. 불수사도복은 강북 5산(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 종주 트레일러닝으로 수도권에서 가장 유명하고 권위 있는 대회다. 6월에는 제16회 경수대간 청광종주(청계산에서 광교산 종주) 36km에서 5시간 44분으로 우승했고, 8월 제22회 지리산 화대종주 48km에서 9시간 57분으로 2위를 차지했다. 강원도 100km, 천진암 100km, 강화 100km, 거제지맥 트레일러닝…. 전국의 산악마라톤은 거의 다 우승해봤단다. 박 씨는 2010년 국내 트레일러닝 우승으로 해외 유명대회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박정순 씨 제공
국내 울트라 및 극지 마라톤 1세대로 각종 해외 울트라 극지 마라톤대회에 참가하며 국내에서 대회도 개최하는 유지성 런엑스런 대표(47)는 “박정순 씨는 환갑의 나이에도 여자부 울트라마라톤의 최강자라고 보면 된다. 울트라마라톤과 트레일러닝에서 그를 따라올 자가 없다. 뛰었다하면 우승이다”고 평가했다.
박 씨는 “성격이 소심한 A형이었다. 하지만 뭘 시작하면 끝을 보는 스타일이다. 시작하기 전에 많이 생각하지만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뿌리를 뽑는다. 운동의 시작은 친구랑 같이했지만 그 친구는 벌써 그만 뒀다. 난 운동을 하며 ‘내가 잘하는 것도 있구나’하며 매진했다. 이젠 ‘내 한계가 어디인가’를 느끼기 위해 달린다”고 말했다.
박정순 씨 제공
“산을 달리면 기분이 좋다. 도로를 달리면 지루한데 산에서는 각종 나무와 꽃, 바위, 돌, 개울 등이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구경하면서 달리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힘들진 않을까.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달리며 참고 인내하는 것을 배운다. 포기하면 삶에서 오는 어려움도 못 이기고 단념할 수도 있다. 극한 상황을 이겨내면 자신감도 생긴다. 산 고개를 오를 땐 힘들지만 정상에 오르고 내려갈 땐 기분이 좋지 않나. 인생도 그런 것 아닌가. 어려움이 있으면 좋을 때도 있고….”
박 씨는 40대 후반 갑작스럽게 닥친 경제적 어려움을 운동으로 극복했다.
“아이들 키우며 큰 빚도 갚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 때 우울증까지 왔다. 신경안정제까지 먹었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을 극복하는 마라톤과 트레일러닝을 통해서 내 자신을 찾았다. 운동은 구렁텅이로 빠질 뻔한 나를 구해줬다.”
걱정하던 가족들이 이젠 응원군이 됐단다.
“우리 딸들이 처음에 엄마가 대회에 나가서 상과 상품을 받아오니 좋아하다 2015년 거제 산악마라톤 때 미끄러져 다리를 다치자 걱정스런 눈으로 봤다. 큰 딸이 ‘몸 다쳐가면서 힘든 운동 하지 말라’고 까지 했다. 그런데 요즘은 ‘엄마가 운동하기 정말 잘했다. 정말 고맙다. 친구 엄마들 보면 다리가 아파 관절 수술도 하고 다른 병으로 입원하는데 엄마는 그런 게 없어서 너무 감사하다. 다만 조심해서 하라’고 한다. ‘엄마가 밝게 사는 것도 좋다’고 한다.”
박 씨는 매일 아침 인천 계양에 있는 계산국민체육센터를 찾아 수영과 헬스를 한 뒤 ‘직장’ 스포츠센터로 향한다. 쉬는 시간이 있으면 계양산을 달린다.
“운동이 삶이 되다보니 운동을 안 하면 몸이 근질거린다. 난 주로 집 근처에서 운동을 한다. 트레일런을 하기 위해 지리산 등으로 훈련가는 사람도 있는데 난 계양산을 달린다.”
박 씨는 물장구마라톤클럽과 불수사도클럽에 가입해 마라톤과 트레일러닝을 즐긴다.
“클럽에 가입은 했지만 훈련은 따로 한다. 회원들 집이 전국으로 흩어져 있기 때문에 모이고 헤어지는 데만 시간이 많이 든다. 대회 때 만나서 함께 하는 게 클럽 회원과 함께 하는 훈련이다. 회식도 대회를 마친 뒤 한다.”
“주위에서 나의 운동 능력을 칭찬하며 ‘어떻게 계속 젊어지느냐’고 한다. 하지만 이젠 즐기면서 달리려고 노력한다. 2015년 다리를 다친 뒤에는 힘들면 천천히 한다. 사실 난 처음부터 뭐든 천천히 했다. 운동을 늦게 시작했으니 천천히 오래 달리는 것에 집중했고 그게 장거리 및 울트라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 같다. 계속 달릴 수 있을 때까지 천천히 달릴 것이다.”
박정순 씨 제공
“집에서 멍하니 있거나 자식 며느리와 아웅다웅하느니 집 근처 국민체육센터나 공원에 가서 운동하고 친구들과 점심도 먹고 하는 게 좋다. 주변에 그런 분들 많은데 참 보기 좋다. 거의 하루종일 체육센터에서 시간 보내다 간다. 다들 건강하다. 100세 시대, 건강이 최고 아닌가.”
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