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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신광영]싸워서 이기는 공권력… 싸움을 안 만드는 공권력

입력 | 2018-10-15 03:00:00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한국의 집회·시위를 접한 해외 경찰들은 두 가지에 놀란다고 한다. 시위대의 조직적인 투쟁력에 놀라고, 경찰의 진압능력에 놀란다. 경찰버스를 밧줄로 묶어 넘어뜨리고 새총으로 나사볼트를 쏘는 것은 해외에선 드문 광경이다. 우리는 경찰 14만 명(의경 포함) 중 3만여 명이 시위를 관리하는 ‘경비 경찰’이지만 미국과 유럽에는 이런 경찰이 따로 없다. 큰 집회가 있을 때 일반 경찰관들이 잠시 차출될 뿐이다. 우리의 막강한 경찰력과 투쟁력은 서로 맷집과 화력을 키우며 진화해온 결과다.

집회를 하는 쪽이건 막는 쪽이건 세계적 인프라와 노하우를 갖고 있지만 시위문화는 아직 후진국에 머물러 있다. 도로나 건물 점거 등 불법을 동원해서라도 여론의 주목을 끌려는 ‘시위 적폐’가 남아 있고, 경찰 역시 시위대를 통제 대상으로 보는 관성을 버리지 못했다.

최근 불거진 불법 시위 면죄부 논란은 투쟁과 진압 일변도의 시위문화가 낳은 소산이다. 11일 국정감사에서 여야는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가 경찰에 ‘쌍용차노조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을 취하하라’고 권고한 것을 두고 오랜 공방을 벌였다. 문재인 대통령도 12일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 불법 시위로 유죄 판결을 받은 강정마을 주민들에 대해 확정판결이 나오는 대로 사면복권을 검토하겠다고 밝혀 논란에 불을 지폈다.

진압이 과했다는 이유로 국가에 인적·물적 피해를 끼친 시위대의 책임을 덜어주는 것이 맞는지를 떠나, 폭력 집회가 여론 분열 등 지속적인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번 논란이 소모적 공방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경찰의 집회 시위 관리 철학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폭력 집회는 원래부터 존재한다기보다 경찰과 시위대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집회 현장 경험이 많은 경찰 정보관들은 시위대가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고 말한다. 참가자들 간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는 얘기다. 경찰의 폭력성을 과장하며 결사항전을 부추기는 전문 ‘시위꾼’도 섞여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경찰이 시위대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진압 장비를 앞세우면 이들은 공동의 적에 맞서는 단일팀으로 결집한다. 시위대가 거칠어지면 경찰도 예민해진다. 작은 적대감이 큰 적대감으로 발전한다.

경찰이 이달 전국으로 확대한 대화경찰(Dialogue police) 제도는 의미 있는 진전이다. 기존에도 경찰 정보관이 사복 차림으로 은밀히 시위대 지도부와 접촉하긴 했지만 이제는 ‘대화경찰’이라고 쓰인 조끼를 입고 시위 현장을 다니며 투명하게 소통하겠다는 것이다. 2004년 스웨덴에서 처음 도입된 이 제도는 이 같은 ‘가시성(visibility)’이 핵심이다. 시위대의 요구를 공개적으로 조율하는 경찰관들이 자주 눈에 띄면 시위 참가자들이 부당하게 궁지에 몰린다는 생각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불법적 수단 없이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집회에서는 참가자들이 선동가 편에 서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2008년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때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은 경찰이 청와대로 가겠다는 시위대를 막는 최후 저지선이었다. ‘명박산성’이라고 불리는 컨테이너를 쌓아올렸고 사이사이 차벽을 쳤다. 시위대는 이 철통경계를 허물겠다며 경찰버스를 흔들고 기어올랐다. 경찰이 이 범법자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시위대와 경찰 여러 명이 다쳤다. ‘명박산성’은 불법을 막는 동시에 유발하는 장치였다.

지난해 말 법원 결정으로 청와대 앞 100m까지 시위대 행진이 허용된 이후 그런 불법 사태는 아직 없다. 막지 않으니 들이받을 의지도 생기지 않는 듯하다. 시위대와 싸워서 이기기보다 애초에 싸움을 만들지 않는 게 더 강한 공권력일 수 있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