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9월 19일 평양 정상회담을 마친 뒤 서명한 평양공동선언을 펼쳐 보이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하지만 폴란드 국민들은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독일의 옛 영토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유대인 학살 등 역사의 구원(舊怨)이 낳은 불신과 반목의 벽은 베를린 장벽만큼이나 두껍고 높았다.
그날 아침 브란트 총리는 바르샤바 시내의 유대인 게토 지구 추모비를 찾았다. 1943년 나치에 항거하다 희생된 유대인을 기리는 기념비 앞에서 그는 고개를 숙였다. 이어 몇 발짝 물러선 뒤 털썩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모은 채 미동도 없는 그의 모습은 세계를 감동시켰다. 다음 날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폴란드 총리는 그를 포옹했다. 이를 계기로 독일은 전범국의 멍에를 벗고, 유럽의 정상국가로 거듭났다. 그 이듬해 브란트는 동서화해 정책(동방정책)을 추진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진정한 사죄와 반성으로 불행한 역사를 청산한 지도자의 결단에 세계가 박수를 보냈다.
브란트의 결단은 작금의 한반도 정세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핵화가 먼저냐, 종전선언·평화협정이 먼저냐’를 놓고 밀고 당기는 대북 협상판의 기저에는 깊은 불신이 똬리를 틀고 있다. 남북미 정상들이 만나 악수하고, 미사여구로 서로 치켜세우지만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네 차례의 정상회담(남북 세 차례, 북-미 한 차례)에도 북한의 비핵화는 답보 상태다.
결국 한반도 정세 대전환의 관건은 김 위원장의 진정성으로 귀결된다. 평양 정상회담에서 밝힌 조속한 핵 폐기와 남북 화해 의지가 본심인지를 입증할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선 세 가지 결단적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고 본다.
첫째는 서울과 수도권을 겨냥한 기습 전력을 후방으로 돌리는 일이다. 군사분계선(MDL) 일대에 배치된 수백 문의 장사정포는 언제라도 수천 발의 생화학 탄두를 대한민국의 심장부에 퍼부을 수 있다. 그 피해 규모는 핵 공격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북한은 전방지역에 다량의 화학무기도 상시 비축해놓고 있다. 이를 그대로 두고서 한민족의 화합 평화를 얘기하는 것은 공허한 말잔치로 비칠 수밖에 없다.
둘째는 조건 없는 핵사찰을 수용하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풍계리 핵실험장과 영변 핵시설 폐기·사찰을 종전선언과 북-미 관계 정상화의 ‘협상 카드’로 내밀었다. 하지만 최대 60여 기로 추정되는 핵무기와 다량의 핵물질,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보유한 북한에 두 시설의 효용가치는 미미하다. 두 시설이 사라져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모의 핵실험이 가능하고, 핵물질도 북한 전역에 숨겨둔 우라늄 농축시설에서 생산할 수 있다. 모든 핵 관련 시설의 신고와 검증 허용이야말로 완전한 비핵화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마지막은 과거 도발의 사죄다. 특히 천안함과 연평도 도발 등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에서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희생된 우리 장병과 유족들에 대한 공식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여부야말로 북한의 화해 평화 의지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본다. 올 12월로 준비 중인 김 위원장의 답방을 그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