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공화국엔 미래가 없다]<10> 규제에 풀죽은 한국의 자율주행차
헬로, 자율주행 친구 부릉아. 한국의 가을은 어떠니. 여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난 도심을 열심히 자율주행 모드로 달리고 있단다. 내가 그동안 일반 도로에서 달린 거리를 재봤더니 1600만 km를 넘었더라고. 지구를 400바퀴 정도 돈 셈이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나는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하지만 네 처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가 않네. 한국에서 넌 편하게 달릴 수가 없다고 들었거든. 친구들도 적고. 우리 같은 자율주행차는 맘껏 달려야 실력이 쑥쑥 클 텐데. 미국으로 올래? 그곳과 달리 여긴 자율주행차들에게 천국이거든. 또 안부 전할게. ―‘구글이’로부터.
심란합니다. 미국 친구 구글이가 제 속을 긁는 e메일을 보내왔네요. 참, 제 소개부터 해야죠. 저는 대한민국의 자율주행차 부릉이랍니다. 요즘 고민이 많은데요, 제 하소연 좀 들어주세요.
지금 한국의 법을 보면 저는 태생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랍니다. 도로교통법 제80조가 운전의 주체를 여전히 ‘사람’으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게다가 한국이 1971년 가입한 제네바 도로교통협약은 ‘운전자가 꼭 운전대를 조작해야 한다’는 의무까지 규정하고 있어요.
자율주행차는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 인공지능(AI)이 운전을 책임져요. 특히 레벨5 수준의 무인(無人)차는 100% 컴퓨터가 차를 운전해요. 만약 기술력이 뛰어난 기업이 이런 무인차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도, 그 차가 한국 도로에 나오는 순간 도로교통법 제80조를 위반한 범죄자, 아니 ‘범죄차’가 된답니다. 현재 국내 도로에서 달릴 수 있는 자율주행차는 국토교통부에서 자율주행 임시면허 허가를 받은 연구용 차들뿐입니다.
하나 더 말해볼까요. 최근에는 일반 자동차를 자율주행차로 바꾸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어요. 얼마 전 만난 메인정보시스템의 박익현 대표는 스마트폰에 자율주행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고, 이를 차량 내 전자기기와 연결시켜 보통 차를 자율주행차로 바꾸는 기술을 연구 중이라고 했어요.
자율주행 트럭·버스 형들도 의기소침하기는 마찬가지예요. 요즘 뜨거운 기술 중 하나가 트럭 군집주행(플래투닝)이거든요. 맨 앞 트럭 한 대를 다른 자율주행 트럭들이 안전하게 따라가는 거죠. 하지만 한국 도로에서는 테스트도 못 해요. 현대자동차에 있는 아저씨가 “트럭이 수 m 간격으로 일정하게 줄지어 달려야 하는데 안전거리 문제, 운전자 미탑승 문제 등이 규제에 걸린다”고 귀띔했어요. 외부와 차단된 연구소 주행시험장에서나 돌아다니고 있대요.
경기도에서 최근 데뷔한 자율주행 셔틀버스 형도 가시밭길을 지나왔어요. 이 형은 운전석이 없는 무인차거든요. 국토부에서 자기인증 안전검사라는 걸 받아야 하는데 이런 전례가 없으니 시간이 오래 걸렸대요. 일반 승용차가 아니라 대중교통인 버스로 만들었는데 규제 때문에 버스전용차로도, 버스정류장도 이용할 수 없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경찰청, 경기도, 국토부가 일부 구간은 이용하도록 허용했대요.
그 사이 일본에 사는 자율주행 친구 ‘구루마’ 상에게 e메일이 왔어요. 읽어보니 더 속이 쓰리네요.
#부릉이에게
곤니치와. 이곳은 요즘 자율주행 붐이야. 일본 정부가 나서서 2025년까지 ‘완전한 자율주행’을 실용화시킬 전략을 내놨거든. 내가 사는 수도 도쿄는 2020년에 올림픽이 열리잖아. 그때 여러 가지 자율주행을 선보일 건가 봐. 게다가 경시청(한국의 경찰청)도 자율주행 테스트 규제를 대폭 줄이겠다고 발표했어. 한국은 어떠니 부릉짱. ―구루마로부터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이 기사는 자율주행기술 관련 국내 기업 취재 내용과 외신을 근거로 자율주행차 시점에서 재구성했습니다. 부릉이, 구글이, 구루마는 각각 한국, 미국, 일본의 자율주행차를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