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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의병서 만세운동까지… 항일투쟁 맥 이은 ‘결사대장 유봉진’

입력 | 2018-10-20 03:00:00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제18화> 강화도-진위대(鎭衛隊)




독립운동가 유봉진 선생(위쪽에서 왼쪽 사진)은 강화진위대 군인 출신으로 1907년 ‘정미의병’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데 이어 1919년 3월 강화도에서 3·1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위쪽에서 오른쪽 사진은 1905년 강화진위대 장교들의 기념사진(앞줄 가운데가 참령 이동휘)이고, 아래쪽 사진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등 만세운동의 중심지였던 선두교회. 이은용 씨 제공·사진연감(1969년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발행)

1919년 3월 초 경성의 마포와 서해안 지역을 배편으로 이어주는 한강 양화진나루(현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성지 공원 일대)는 크고 작은 배와 전국 팔도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선창에서 정박 중이던 기선(汽船)이 이윽고 출항을 알리는 소리를 내자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때 한 청년이 승객들 사이로 재빨리 숨어들었다. 청년은 곧장 강화도행 기선에 올라탔다.

굳게 다문 입술, 눈매가 다소 날카로운 이 청년은 연희전문학교 2학년생 황도문(1897∼1950). 3월 1일 탑동공원(탑골공원) 만세운동과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 학생 연합 시위에 모두 참가한 그는 용케 일경(日警)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황도문은 배편으로 고향인 강화도에 도착할 때까지 무사하기를 빌었다. 그의 품속에는 조선총독부가 경성 외부로 전파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불운한’ 문서들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대표 33인 명의의 3·1독립선언서, 독립만세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지하신문인 ‘국민회보’ ‘조선독립신문’ 등 각종 유인물이었다. 뱃고동을 요란하게 울린 기선은 증기를 숨 가쁘게 내뿜으며 한강을 따라 하류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때서야 황도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3월 6일, 경기 강화군(이하 강화도) 길상면 선두리 고향에 도착한 황도문은 곧장 고개 너머 이웃 마을인 온수리에서 은 세공업을 하는 유봉진(1886∼1956)을 찾았다. 고향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의 정겨운 해후도 잠깐, 황도문은 유봉진에게 문서 더미를 꺼내 보였다.

강화도에서 첫선을 보인 독립선언서와 지하신문을 받아본 유봉진의 손이 떨렸다. 그간 섬에서 소문으로만 들었던 경성의 열렬한 만세운동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유봉진은 강화도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펼치자는 스물두 살의 열혈 청년 황도문을 대하면서 10여 년 전의 자신을 보는 듯했다. 그 역시 20대 청춘에 강화도에서 항일의병 활동을 한 독립투사였다. 황도문의 진지한 태도에 감동을 받은 유봉진은 독립 투쟁에서 만세 운동으로 다시 한 번 인생을 던지는 결심을 한다.



○ 군인에서 의병으로

은 세공업자 유봉진은 원래 대한제국 강화진위대 소속 군인이었다. 그의 아버지(유홍준) 또한 강화진위대의 장교를 지냈다. 1900년대 초 유봉진이 근무하던 시기 강화진위대는 1000여 병력을 보유한 대부대였다. 강화도가 수도 한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해로를 지키는 길목으로, ‘인후지지(咽喉之地)’의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군 지휘자는 후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1873∼1935). 참령(參領·대대장) 이동휘의 지휘 아래 강화진위대는 근대식 군사훈련과 양총(洋銃) 등 신식 무기로 무장한 정예부대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 대한제국은 너무나 힘이 미약했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군대부터 감축시켰다.

힘없는 나라의 무장(武將) 이동휘와 휘하 부대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딱히 없었다. 이동휘는 군복을 벗은 후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만이 나라를 살릴 길이라고 판단했다. ‘일동일교(一洞一校·마을마다 학교를 하나씩 세움)’의 구국(救國)교육 운동을 펼치는 이동휘와 의형제를 맺은 유봉진도 적극 동참했다. 일동일교 운동을 전개한 지 불과 2년 만인 1907년 강화도엔 무려 72개의 사립학교가 설립됐다.

그런데 바로 그해, 스물한 살의 청년 유봉진은 뜻하지 않게 다시 총을 쥐게 된다. 이른바 ‘정미(丁未) 의병’이란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된 사건이다. 1907년 7월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는 조치를 취했다. 8월 9일 ‘나라님의 명(命)’이란 말 한마디로 총을 뺏기고 군복을 벗는 치욕을 당한 진위대 군인들은 분연히 일어섰다. 이들은 무기고로 가서 총과 탄환을 챙겼다.(강화문화원, ‘강화사’)

진위대 부교(副校·하사관) 출신의 연기우와 지홍윤, 참교(參校) 출신의 유명규 등은 본격적으로 항일의병 부대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무기를 탈취한 민간인들도 합세했다. 진위대 출신 봉기군 50명을 포함해 300여 명으로 구성된 민(民)·군(軍) 연합 의병부대가 탄생했다. 의병부대는 친일집단 일진회의 간부인 강화군수(정경수) 처단, 주재소(파출소)의 일본인 순경 사살, 친일 공무원 축출 등 활동을 펼치며 강화도를 삽시간에 장악해 갔다.(‘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유봉진도 진위대 후배들의 활약을 그냥 지켜보지는 않았다. 그가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앞으로 보낸 자기소개 이력서엔 강화 의병 봉기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정미(1907년) 대한군대 해산 시에 군기탄약고를 파괴하고, 탄환을 수출(搜出)하여 분배하고, 갑곶에 출전하여 강화군대를 해산시키려는 일본 병정들이 육지에 도착했을 때 격파하고….”

실제로 1907년 8월 11일 강화도가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군사령부는 수원의 1개 소대 병력을 출동시켰다. 기관총 2문을 이끌고 물때에 맞추어 갑곶 돈대에 들어온 일본군과 의병들 간에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매복한 의병들은 일본군 6명 사망, 부상자 8명이라는 전과를 올렸다.(‘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13일)

정식 군사 훈련으로 무장한 의병부대의 활약은 대단했다. 일본군은 인천과 용산의 병력까지 동원해야 했다. 의병부대는 결국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강화 읍내에서 물러난 의병부대는 이후 인근 경기도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강화도 산악으로 숨어들어 장기전에 돌입한다.



○ 길상 결사대

유봉진은 갑곶 전투에 참여한 이후 일제 군경의 감시망을 피해 감리교회 권사 신분으로 조용하게 살아갔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삶일 뿐이었다. 그는 정미의병 당시 일본군의 보복으로 억울하게 숨진 강화 사람들의 희생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열한 살 연하인 황도문의 방문으로 그의 가슴속에 묻어놓은 항일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당시로서는 결코 젊지 않은 나이(33세)인 유봉진은 아내(조인애)에게 3·1만세운동에 목숨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묵묵히 듣던 그의 아내도 만세운동에 동참하겠다고 결연하게 말했다. 유봉진은 먼저 강화도 길상면의 감리교도들을 중심으로 ‘길상결사대’를 조직했다. 유봉진이 결사대장을 맡고, 황도문 황유부 염성오 장윤백 조종렬 조종환 등 교회 지도급 인사들이 동참했다. 유봉진은 강화 본도는 물론이고 부속 섬들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며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그는 속옷 상의에다 ‘유봉진 독립결사대’라고 쓴 글씨를 펼쳐 보이며 동지들을 규합했다.

3월 18일 강화읍 장날,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한 바로 그날이 왔다. 따스한 봄볕이 완연한 장터는 사람들로 붐볐다. 결사대원들은 강화 주민들과 장꾼들 속에 섞여 있었다. 오후 2시 웃장터와 아랫장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두 장터를 관통하는 돌다리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심전심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만세 소리와 함께 감격에 겨운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태극기를 보고 덩실덩실 춤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새 인파는 수천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장터를 순찰 중이던 일제 군경이 재빨리 달려와서는 시위를 주도하던 조기신 유희철 장상용 등 결사대원들을 체포해 끌고 갔다. 뜨거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어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저 멀리서 백마를 탄 사람이 마치 장군처럼 나타났다. ‘결사대 유봉진’이라는 글씨가 쓰인 태극기를 어깨에 두른 결사대장이었다. 유봉진은 종루(현재 강화읍 관청리 김상용순절비가 있는 곳)에 올라 종을 쳐 군중을 불러 모았다. 싸늘하게 가라앉았던 군중이 다시 함성으로 화답했다. 일경은 유봉진도 체포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용납하지 않았다.

유봉진과 시위 군중은 한국인 순사들에게도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촉했다. 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일경은 철수해버렸고 시위대는 군청으로 몰려갔다. 강화군수 이봉종에게도 조선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했다.

“만약 응하지 않으면 군청으로 들어가 청을 파괴하겠다.”

결사대의 겁박에 질린 군수는 마지못해 만세를 불렀다. 다음 목표는 경찰서였다. 시위대는 경찰서를 완전히 포위한 다음 돌다리에서 잡혀간 결사대원들을 석방할 것과 시위 군중에게 칼을 빼어든 순사보 김덕찬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경찰은 시위대의 위세에 굴복해 체포한 결사대원들을 풀어주었다. 유봉진은 다시 시장에 모인 군중을 대상으로 연설했다.

“파리강화회의에서는 조선인이 독립을 희망하는지 아닌지를 보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독립만세를 불러야 한다. 내일 정오에는 온수리에 모여서 만세를 부르며 점차 각 면을 돌면서 만세를 불러야 한다.”(‘예심종결결정서’)

군중은 내일을 기약하며 해산했다. 당시 일제 보고서와 시위 통계자료에는 군청 앞에 모인 군중은 5000∼6000명, 시장에 모인 전체 군중은 1만 명(혹은 2만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규모 면에서 강화도 만세운동은 3월 5일 서울 학생 시위, 3월 23일 경남 합천군 시위와 함께 한 집회에서 1만 명 이상을 동원한 대규모 운동 중 하나로 기록된다.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강화도 3월 18일의 시위에서는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유봉진이 군중의 폭력적 행동만큼은 적극 제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미의병 때의 경험에 비추어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와 군중이 희생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 마니산에 숨은 결사대장

강화도 선두감리교회(선두교회 후신) 마당에 세워진 3·1운동기념비. 비문에 “연희전문학교 학생인 황도문 장로가 독립선언서를 몸에 숨겨가지고 고향인 강화도에 귀향하여…”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작은 사진은 황도문 선생. 강화=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기자는 10월 중순 의병운동과 3·1항쟁에 모두 참여한 유봉진의 행적을 찾아 강화도에 갔다. 의병 활동을 하다가 중국 만주 등으로 넘어가 해외 무장투쟁을 이어간 경우는 적지 않지만, 국내에 남아 두 운동에 모두 참여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동행한 강화3·1운동기념사업회 이은용 이사장(강화인문연구소 소장)은 “의병운동과 3·1만세운동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말했다.

길상면 선두리의 선두교회 터가 바로 그곳. 경성에서 독립선언서를 들고 온 황도문이 다닌 예배당이자 3·1만세운동에서 길직교회와 함께 길상결사대의 주축을 이룬 교회다. 원 선두교회에서 300m쯤 떨어진 곳에 새로 지은 선두감리교회 마당에는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황도문과 교인들의 활약을 기록한 기념비도 있었다. 기념비는 이곳이 강화 3·1운동의 정신적 중심지라고 자부하는 듯 웅장한 모습이었다.

선두교회 바로 맞은편으로는 마니산 줄기 중 하나인 초피산(252.6m)이 보였다. 유봉진이 만세운동 후 일본 군경의 체포를 피해 숨어 있던 곳이다. 초피산은 크지 않은 산이지만 산세가 험해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그런데 일경은 유봉진의 부모까지 잡아가 모진 핍박을 했다. 결국 유봉진은 자진 출두해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아내 역시 같은 혐의로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선두리에는 정미의병 운동의 자취도 남아 있다. 이은용 이사장은 선두교회와 바로 앞 초피산 사이를 길게 가르며 흐르는 길정천의 둑을 가리키며 ‘족실(足失)방죽’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의병장 이능권이 이끄는 의병부대(대동창의진)가 선두리 뒷산인 정족산 등지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전투에 패배한 일본군 30여 명의 다리를 잘라 방죽에 던진 곳으로 구전돼오고 있다는 것.

강화도의 3·1항쟁은 일본 군경의 강력한 탄압에도 만세 소리가 꺼지지 않았다. 1919년 3월과 4월에 걸쳐 만세 함성이 고을고을 메아리쳤고, 야간에는 횃불 시위도 전개됐다. 육지와 떨어진 섬에서 가열차게 전개된 강화도 만세운동의 저력은 무엇일까.

“원래부터 강화도는 외세 침략에 맞서는 저항의식이 남달랐던 지역이다. 1866년 프랑스군의 강화도 점령(병인양요), 1871년 미국함대의 침략(신미양요), 1876년 강화도 연무당에서 맺은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등을 잇달아 겪으면서 강화인들은 국토 수호 의지를 강하게 다져왔다. 개항 이후 강화도만큼은 일본 자본과 상인들이 거의 침투하지 못했던 것도, 의병운동과 3·1운동이 한 축으로 연결돼 줄기차게 항일투쟁을 한 것도 이 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일 것이다.”

이은용 이사장의 말에서 강화도의 3·1운동 유적지는 ‘역사를 알아야 국혼(國魂)이 산다’는 말을 증명하는 현장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강화=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