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글로벌 인터뷰]끈질기게, 상식의 사슬을 끊는 자를 노벨상은 주목한다

입력 | 2018-10-22 03:00:00

2018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혼조 다스쿠 교토대 특별교수




동창들의 증언에 따르면 혼조 다스쿠 교수는 학생시절부터 공부도 놀이도 제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요즘 취미는 골프다. 본인의 나이와 같은 스코어를 내는 ‘에이지 슛’이 꿈이다. 그는 “지금도 80 초반대 스코어는 나오니 79세까지 앞으로 3년 내에 에이지 슛 달성을 목표로 하고 싶다”고 말했다. 교토=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 18일 오후 찾은 혼조 교수의 교토대 연구실 주변은 축하 화분이 여기저기 늘어서 있었다. 그는 교토대가 정년이 지난 우수한 연구자를 잡아두기 위해 만든 정규직 ‘특별교수’ 4명 중 1명이다. 요즘도 거의 매일 학교에 나와 연구자들을 지도한다. 당초 ‘딱 30분만’이라던 그는 막상 얘기를 시작하니 1시간 20분간 시간을 내줬다. 》
 

○ 오랜 세월 연구를 지탱해온 원동력은 ‘호기심’

1992년 한 대학원생의 연구에서 우연히 새로운 분자가 발견됐다. “어, 재밌는 놈일세.” 혼조 교수는 이 대학원생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에도 PD-1이라 명명한 이 분자를 들여다봤다. 4년 뒤 PD-1이 이물질을 공격해 몸을 지키는 ‘면역’에 브레이크를 거는 역할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이 브레이크를 막으면 면역이 암을 공격하게 되지 않을까. 응용을 생각했다. 호기심에서 시작된 그의 연구는 2014년 새로운 암 치료제 ‘옵디보’ 시판으로 이어졌다. 옵디보는 과거 외과수술과 방사선, 항암제 중심이던 암 치료를 크게 바꾸고 있다.

―우연한 발견이네요.

“내가 암 전문가가 아닌 문외한이란 점이 주효했다. 당시 면역의 힘으로 암을 치료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해 면역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돼 있었다. 하지만 문외한은 그런 ‘상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특허를 공동 출원한 오노(小野)제약공업은 1년간 국내 제약회사에 공동 개발을 타진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오히려 ‘이런 것에 손대면 회사가 망한다’는 충고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데이터를 볼 때 쥐 실험에서 이 정도 효과가 있다면 사람에게 듣지 않을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미국의 벤처회사에 얘기를 꺼내자 1시간 만에 ‘하겠다’는 답이 왔다. 그 뒤 다른 벤처와 오노약품이 개발하면서 일이 술술 풀렸다. 임상실험에서 말기암 환자 296명에게 투여하자 폐암 환자, 피부암의 일종인 멜라노마 환자, 신장암 환자의 약 20∼30%에서 암이 줄어들었다.”

옵디보는 2014년 일본에서 멜라노마 치료약으로 승인난 뒤 점차 폐암, 신장암 치료제로도 승인을 받았다. 지난달 현재 54개국에서 승인됐다.


―돌멩이를 주워 갈고닦았더니 다이아몬드가 됐다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가능했나.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했기 때문이다. 젊은 연구자들의 정열과 에너지가 행운을 불렀다고 생각한다.”

―젊은 연구자에게 ‘연구비를 뿌려 주라’는 말씀을 자주 하는데….

“기초과학은 과학자가 자유로운 호기심과 발상에 기초해 새로운 자연의 원리 등을 발견하려는 연구다. 다만 성과를 단기간에 실용화하기 어려워 연구비 획득이 어렵다. 생명과학은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생명현상 자체가 미지의 요소가 많은 블랙박스이기 때문이다. PD-1처럼 어느 분야에서 알아낸 것이 생각지도 못한 분야에 연결돼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경우도 자주 있다. 중요한 것은 기회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1억 엔을 1명에게 몰아 주는 게 아니라 10명에게 나눠 줘서 10개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쪽이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 “과학에서 실패는 낭비가 아니다”

―일본 정부는 ‘선택과 집중’을 강조하고 모럴해저드와 예산 낭비를 우려한다.

“무엇을 낭비로 볼 것이냐의 문제다. 과학에서는 실패의 경험도 쌓이면 지식이 된다. 결코 낭비가 아니다. 이건 정치인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울 거다. 맛있는 감을 얻으려면 씨를 많이 뿌려야 한다. 어느 것이 싹을 틔울지, 가지가 자랄지, 꽃이 필지, 열매가 맺어질지 모른다. 폭넓게 많이 투자해 그것이 성공하면 리턴도 크다.”

―교수님이 지적한 요즘 일본 기초과학의 문제점을 한국도 안고 있다. 정부도 기업도 사회도 결과중심주의로 근시안적인 일에만 관심이 있다. 한국 출신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아직 없다.

“한국의 생명과학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내가 만나본 개개 학자들은 우수한 사람들이 많았다. 앞서도 말했듯 맛있는 감을 얻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정치인처럼 4, 5년에 1번씩 선거를 위해 애드벌룬 띄우는 이들에겐 괴로운 판단이지만 연구란 그런 것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메이지(明治) 유신 얘기를 꺼냈다.

“150년 전, 일본은 그런 노력을 꽤 많이 했다. 학문을 전부 서양식으로 바꾸기 위해 국가재정에 영향을 줄 정도로 비싼 돈을 들여 외국인 교사를 고용했다. 그들로부터 기초부터 배우고 그걸 전부 일본어로 번역 정리해 일본어로 교육할 수 있게 했다. 젊은이들이 자기 머리로 여러 개념을 생각하기 쉽게 만든 것이다. 과학의 폭이 넓어진 비결이 됐다.”

―연구실이 다국적이라 놀랐다. 한국인은 없나.

“한국인 유학생은 1980년대에 10여 명 정도 있었다. 이번에 축하전화도 걸려 왔다. 현재 연구원의 80% 정도는 외국인이다. 인도인이 가장 많다. 대학에는 다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러 곳에서 온 동료가 있고 괴짜 같은 사람도 접촉해야 사람이 성장한다.”

―교토대가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가 10명이 됐다. 교토대가 노벨상에 강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끼리는 ‘자유로운 학풍’과 관련 있다고 말한다. 교토대는 독특한 자기주장이 용인되고, ‘재미있는 걸 하자’는 분위기가 허용된다.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일 진행은 느리지만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려 애쓰는 분위기가 있다.”

○ 신약 특허료 기부해 연구자 지원기금 설치

―젊은 연구자들을 돕기 위해 교토대에 연구자 지원기금을 만들겠다고 밝혔는데….

“내가 오노약품과 공동 출원한 특허는 옵디보만이 아니고 PD-1 분자를 활용한 신약 모두를 커버한다. 2024년이면 이 시장은 연간 4조5000만 엔(약 45조3200억 원) 매출을 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그중 1%만 들어와도 연간 450억 엔(약 4532억 원)이다. 그게 최종적으로 교토대로 들어온다. 매년 누적되면 1000억 엔은 금방 넘을 거다. 30대 정도의 젊은 연구자들에게 장기적 지원을 하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한다.

“생명과학 연구가 급속히 발전하고 지식의 양은 방대해져 교과서가 금세 쓸모없어지는 시대다. 인터넷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많으니 모든 것을 머릿속에 넣을 필요는 없지만 원리원칙이 머릿속에 서 있지 않으면 휘둘리게 된다. 무엇이 줄기이고 무엇이 가지인지를 구분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의료 세계에서도 막대한 지식을 구사해 판단하는 일은 인공지능(AI) 쪽이 잘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큰 시야를 가진 연구를 해줬으면 한다.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때로는 제3자적인 입장에서 볼 필요가 있다.”

그는 한국 얘기가 나오자 양국 간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긴 역사로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중국 한국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국력과 문명도를 높여왔다. 미래를 내다볼 때 동아시아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발전하고 학술적 교류도 하는 게 중요하다. 향후 우리의 최대 과제는 ‘얼마나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느냐’에 있다고 본다. 한국도 중국도 고령화 사회를 맞이하고 있다. 면역의 힘을 극대화하는 것은 노년의 행복을 지키는 데에도 중요하다. 사실 노화 자체도 면역의 힘에 좌우된다. 면역의 힘으로 알츠하이머 제어가 가능하다면 인류에게 축복이 될 것이다.”

―암은 정복된다고 보나.

“암이 위협이 아닌 날이 금세기 중에는 올 것이다. 면역은 굉장한 힘을 가졌지만 아직 미지의 영역이 많다. 거기서 연구의 기쁨이 나온다. 페니실린 뒤 많은 항생물질이 쏟아져 나왔듯이 면역치료약 역사도 이제 시작일 뿐이다. 젊은 연구자들이 할 일이 많다.”
 
교토=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