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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남의 이야기를 가져가는 곳

입력 | 2018-10-25 03:00:00

[동네 책방의 진열대]<1>서울 연희동 ‘밤의서점’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의 조용한 연희동 주택가 뒷골목에 동네책방 ‘밤의서점’이 있다.

《골목과 골목 사이 숨어 있는 자그마한 책방만큼 정겨운 풍경이 또 있을까요? 잘 안 팔려도 오래도록 진열해놓고 싶은 책, 대형서점 베스트셀러와는 다른 ‘우리 동네 베스트셀러’…. 전국 동네서점 주인장들이 ‘동네 책방의 진열대’를 소개합니다. 》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책만큼 애달픈 것도 없다. 너무도 아끼던 책이고, 절판된 경우에는 더더욱. 미국 소설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문과 출신인 내게 과학과 수학으로 그려낸 세계가 얼마나 서정적일 수 있는지 일깨워주었다. 이 세계 너머를 가리키는 작가의 손가락을 따라가며 나는 철학과 종교, 이야기가 잘 짜인 모험에 뛰어든 기분이었다. 그런데 아끼던 그 책이 누군가의 책장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더니, 결국 절판되고 말았다.

김미정 대표가 진열대를 정리하는 모습. 서점 손님 한여름 씨가 찍은 사진이다. 밤의서점 제공

시간이 흘러 나는 서점 주인이 됐고, 이 책이 원작인 영화(‘컨택트’·2017년) 개봉을 계기로 개정판을 출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손님들에게 어서 소개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영화는 반응이 좋았지만 막상 서점을 찾은 이들은 여전히 과학소설(SF)을 낯설어했다. 결국 책의 정체를 숨긴 채 ‘블라인드 데이트(표지를 가리고 점장 코멘트를 적어놓은 책)’로 만들어 꾸준히 소개했다. ‘밤의서점’을 통해 테드 창을 만난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오후 9시면 가게들이 문을 닫는 조용한 연희동 구석에서, ‘밤의서점’은 ‘이 세계 너머를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공간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여럿이 몰려오는 손님보다 혼자 오는 분들을 기다린다. 밤이 내린 서가에 잠겨 자신에게 몰입하는 시간을 갖다 보면, 스러져가던 ‘마음의 빛’을 다시 밝힐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참, ‘밤의서점’에는 창의 소설 외에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밤의서점 이야기 상자’가 그것이다. 손님이 자기 이야기를 써서 이 상자에 넣으면 다른 손님의 이야기를 받을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가져간다.’ 나는 이것이 동네 모퉁이에 작은 서점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서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 점장과 나눈 대화, 그날의 공기와 풍경, 회사에서 있었던 일….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이룬다. ‘내 인생의 이야기’는 내 품을 떠나 상자 속에 보관된다. 그리고 누군지 모를 타인에게 도달해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교류가 대상을 의식한 연결이라면, 이 이야기를 통한 연결은 솔직하고 무해하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가 닿을 수 있다. 절판됐던 책이 생명을 얻었듯이, 당신의 순간은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와 공유된다.

‘밤의서점’에는 두 가지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있다. 창의 소설을 읽으셨다면, 이제 서점에 와서 당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차례다. ‘밤의서점’은 당신이 인생의 이야기를 발견하기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밤의서점’은

‘마음의 빛을 찾아가는 한밤의 서재’가 되고자 한다. 심리서와 인문서, 시·소설, 그림책, 그래픽노블을 비롯해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다양한 장르의 책을 판다.

김미정 ‘밤의서점’(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