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언론인 피살 계기로 본 ‘정보기관 살인’ 의혹 사건들
자말 카슈끄지
‘카슈끄지 사건’은 살해 과정이 마치 원한 관계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잔인해 ‘왜 한 사람의 언론인을 이렇게까지 참혹하게 죽였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사우디의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의 개입 의혹이 제기돼 사우디에서 처음으로 ‘여성 운전’을 허용하는 등 ‘개혁 군주’로 평가받아 온 무함마드 왕세자의 정치적 운명에도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2005년 국가정보원의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중정 연수생 2명이 동구권 외국인 2명을 매수해 권총 7발로 김형욱을 살해한 뒤 인근 숲에 버렸다고 발표했다.
2일 이스탄불의 사우디 총영사관에 들어갔다가 고문 끝에 손가락이 잘리고 참수형을 당하는 등 시신이 훼손된 카슈끄지도 총영사 관저의 정원에 매장되거나 우물에 유기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살해 과정이 처참하고 시신도 제대로 수습되지 못하고 버려진 점도 닮은꼴이다.
김형욱은 △파리 근교에서 살해 후 양계장 분쇄기로 처리 △파리에서 살해 후 센강에 유기 △서울로 납치 후 청와대 지하실에서 살해 등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도는 등 사건 진상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 ‘음악 들으며 토막 살인, 시체 유기’, 친왕실 인물을 “왜 이렇게까지”
25일 터키 이스탄불 사우디아라비아 총영사관 앞에서 2일 피살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를 추모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한 참가자가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가면을 쓰고 손바닥에 가짜 피를 묻힌 채 참여해 사건 배후 인물이 왕세자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스탄불=AP 뉴시스
15명의 ‘살해 요원’ 중 한 명인 법의학자 살라흐 무함마드 알 투바이끼는 범행 과정에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다른 ‘살해 요원’들에게도 함께 듣자고 권유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그는 지난해 9월 미국으로 건너가 시민권을 신청한 뒤에는 WP에 사우디와 특히 무함마드 왕세자를 맹공격하는 칼럼을 실었다.
10월 31일에는 “사우디의 왕세자가 극단주의자를 분쇄하려고 하지만 엉뚱한 사람을 처벌하고 있다”고 비판하는가 하면, 일주일 후에는 ‘무함마드 왕세자는 푸틴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칼럼에서 “고위 관리와 사우디 왕실의 왕자들은 여느 나라처럼 뇌물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계약 규모를 엄청나게 부풀리거나 신기루 같은 계약을 하면서 억만장자가 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올해 1월에는 “사우디 왕자는 이란의 시위를 걱정해야 할 것”이라면서 내부적인 저항을 부추기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WP)가 19일 공개한 마지막 미공개 칼럼 ‘아랍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최근 언론에 칼럼을 집필해 온 유명 작가가 영장도 없이 5년형에 처해졌다”며 자유가 없는 국가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달 초 실종되기 전까지 제목에도 ‘왕세자’를 꼭 집어 거명하는 칼럼을 잇달아 썼다. 카슈끄지 살해 사건이 나자 무함마드 왕세자가 주도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차기 대권’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다른 왕자들과 벌인 ‘왕자의 난’에서 카슈끄지가 정적의 편에 섰을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카슈끄지가 사우디 왕실에 맞서다 참혹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의 집안은 왕실과 친했다. 언론 보도와 위키피디아 등에 따르면 터키계인 카슈끄지의 조부 무함마드 카슈끄지는 사우디 왕정을 세운 압둘라 알 사우드 초대 국왕의 주치의였다. 삼촌 아드난 카슈끄지는 1980년대 초반에는 무기 거래 등으로 40억 달러의 부를 축적한 유명한 무기상이었다. 사우디 정치 체제에서 왕실과 가까운 집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카슈끄지는 1997년 8월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함께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집트인 애인 도디 파예드의 조카라고 위키피디아는 전한다.
○ 카슈끄지 사건 파장 어디까지
무함마드 왕세자는 카슈끄지의 아들을 만나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고 사우디 정부는 카슈끄지 가족들의 출국금지를 해제하는 등 사건과의 거리 두기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개입 의혹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으면서 무함마드 왕세자의 정치적 운명에 어떤 변화가 올지 주목된다. 그는 2015년 30세 나이로 국방장관을 맡는 등 사우디 정치 경제 외교를 장악하고 있다. 왕자 11명과 반대 세력 수십 명을 체포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차기 대권’을 예약해 놓으며 ‘개혁 군주’로 기대를 모았다.
랜드 폴 민주당 상원의원 등 미국 일각에서는 왕세자 교체설까지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입지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많다. 박현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미국에 사우디는 대중동 정책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동맹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버릴 수 없는 관계”라며 “장기적으로 카슈끄지 사건을 어느 정도 덮고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왕세자의 급진 개혁에 대한 피로감이 있지만,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이 뒤에서 버티고 있기에 왕세자 교체가 쉽게 이뤄질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카슈끄지 사건이 중동 인권 운동을 여는 분수령이 될지도 관심사다. 한국외국어대 김수완 교수는 “아랍의 봄 이후 인권 이슈가 대두됐지만 사우디는 ‘석유 복지’로 인권에 대한 열망을 눌러왔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바람을 타고 젊은층의 인식이 변하고 있는데, 카슈끄지의 사건이 인권 문제에 불을 지필 가능성도 있다”고 점쳤다.
미국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 만큼 사우디 정부를 감쌀 수만은 없는 상황이 됐다. 김 교수는 “사우디가 지나치게 미국을 믿고 무리한 암살 계획을 실행한 것 같다. 재러드 쿠슈너를 통해 무함마드 왕세자가 ‘미국이 나를 배신할 줄 몰랐다. (미국이 아닌) 다른 창구를 찾을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고 했다. 사우디의 오판은 인권 감수성에 대한 양국의 온도차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박 교수는 “미국이 인권 문제에 민감하고 강경하게 대응해 온 반면 중동은 인권 문제를 방조해 왔다. 사우디가 이런 온도차를 간과한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유럽연합(EU)은 사우디에 대한 무기 금수 결의안을 채택하는 등 반인권 사건을 비판하고 나섰지만 중동 외교 정세에 미치는 파장은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무함마드 왕세자는 24일 사건 이후 처음으로 전화 통화를 가졌다. 통화 후 터키 관리와 언론 매체의 사우디 왕세자 때리기가 급격히 수그러들었다고 외신은 전한다. 터키는 카슈끄지 사건을 계기로 자국 내 쿠르드족에 대한 사우디의 지원이 줄어들기를 기대하고 있다. 러시아는 카슈끄지 살해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우디 측을 옹호하면서 미국과 사우디 간에 생기는 긴장 관계의 틈새를 파고들려는 의도도 나타내고 있다.
○ ‘권력 살인 의혹 사건’들
올 3월 영국 남부 솔즈베리에서 쓰러진 러시아 정보기관 출신 세르게이 스크리팔 부녀 사건도 그중 하나다. 당시 영국 광역경찰청 대테러작전 팀은 “스크리팔 부녀는 러시아에서 1970년대 개발된 신경작용제 노비초크에 노출됐다. 이는 명백한 테러”라고 말했다.
전직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는 영국으로 망명한 뒤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을 비판해 오다 2006년 런던의 한 호텔에서 사망했다. 러시아 정보요원들과 홍차를 마신 지 2주가 지난 뒤의 일로 그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 찻잔에서 인공 방사능 물질인 폴로늄이 검출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은 지난해 2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맹독성 신경작용제 VX로 살해됐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