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부터는 아무도 동행할 수 없다/보던 책 덮어놓고 안경도 전화도/신용카드도 종이 한 장 들고 갈 수 없는/수십억 광년의 멀고먼 여정/무거운 몸으로는 갈 수 없어/마음 하나 가볍게 몸은 두고 떠나야 한다/천체의 별, 별 중의 가장 작은 별을 향해/나르며 돌아보며 아득히 두고 온/옆집의 감나무 가지 끝에/무시로 맴도는 바람이 되고/눈마다 움트는 이른 봄 새순이 되어/그리운 것들의 가슴 적시고/그 창에 비치는 별이 되기를 ―홍윤숙, ‘여기서부터는’
고 홍윤숙 시인의 생애 마지막 시집 ‘쓸쓸함을 위하여’에 실린 시다. 3년 전 이맘때 깊어가는 가을, 선생님은 하느님의 품에 영원히 안기셨다. 사제가 되려는 나에게 선생님은 때로는 큰누나처럼 사랑을 베풀어 주셨고, 내 삶의 중요한 대목마다 멘토가 되어 주셨던 분이다.
늘 잔잔한 웃음으로 타인을 배려하시는 선생님은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늘 꼿꼿하고 단아하셨다. 철저한 자기 성찰로 허세를 허용치 않던 그가 바라보는 이 세상은 철저히 ‘타관’이었다. 그 타관에서 맞닥뜨리는 깊은 비애와 비장함은 자기애로부터 나오는 감상이 아니라 부조리한 세상에 감춰진 ‘진리의 빛과 존재의 실상’을 향한 ‘운명적 목마름’이었다.
그는 “시는 내 생을 관통해간 한 발의 탄환”이라 했다. “그 탄환은, 더 깊이, 더 속으로, 더 뜨겁게 내 생을 관통하여 상처를 남겼고 그 상흔은 황홀한 상흔이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생애는 전쟁의 참혹함은 물론이고 대립과 혼동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그의 역사의식은 “어떻게 품위를 지닌 한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지니고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맞닿아 있었다.
조광호 신부·화가·인천가톨릭대 명예교수
조광호 신부·화가·인천가톨릭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