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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벗으면 주연 시켜줄게” 오디션장의 악몽

입력 | 2018-10-29 03:00:00

[컬처 까talk]대중문화계 ‘乙의 눈물’




신인 배우 A 씨(27·여)는 올해 초 한 영화 오디션에서 겪었던 악몽 같은 일이 잊혀지지 않아 힘들다. 조연을 지원했는데 면접장에서 제작자가 “(옷을) 벗으면 주연을 시켜주겠다”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A 씨는 가까스로 “그건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거절한 뒤 뛰쳐나왔다. A 씨는 “너무 두려워 지금까지도 면접을 보러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신인 배우나 배우 지망생들은 이런 일이 흔하다고 입을 모은다. 10대 보이밴드 ‘더 이스트라이트’에 대한 프로듀서의 폭행 사실이 폭로되면서 출연료 미지급, 성추행, 폭행 등 문화계에 만연한 ‘을(乙)의 설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예술계의 불공정 거래를 개선하기 위해 한국콘텐츠진흥원에 공정상생센터,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예술인 신문고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배우 민지혁은 영화 ‘임의 침묵’ 제작사가 오디션 배우들에게 면접비 1만 원을 요구했다고 지난달 폭로했다. 연출을 맡은 한명구 감독은 “오디션비는 관행이며 지원자들의 간식비로 다 쓰였다”고 반박했다. 배우 지망생들도 “면접비 요구는 종종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한 영화계 구인구직 온라인 사이트에는 1만 원 선의 면접비를 요구하는 공고가 적지 않다. 신인 배우 김모 씨(25·여)는 “면접비 5000원을 준비하지 못하고 면접장에 갔는데 ‘이 정도도 못 내느냐’는 핀잔을 들었다”고 말했다.

고질적 문제인 출연료 미지급도 여전하다. 작품에 출연하는 것 자체를 ‘스펙’으로 인식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신인 배우 B 씨(25·여)는 “정당한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이 돼도 ‘사전에 계약서를 쓰자’고 하면 제작사에서 화를 낸다”고 말했다. 배우들은 제작사가 계약서 작성을 거론하지 않으면 출연료를 사실상 포기해야 한다고 여길 정도다. 원로 배우 이순재 씨도 “몇 년 전 출연료를 받지 못한 일이 있다”고 말했다.

교육을 명분으로 기획사에서 연습생에게 금전을 요구하는 악습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바른미래당 김수민 의원이 콘텐츠진흥원에서 받은 ‘대중문화예술 법률자문 내역’에 따르면 지난해 5월부터 올해 8월까지 163건의 상담 중 75건이 연습생에 대한 기획사의 금전 요구나 계약 불이행에 대한 고소 고발이다.

연습생들은 데뷔할 기회가 제한된 데다 소속사 대표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수직적 구조가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3년간 아이돌 그룹 데뷔를 준비했던 C 씨(23)는 “소속사 없이 연예인으로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폭언, 폭행은 참고 견뎌야 한다. 부모가 나서 ‘조금만 참자’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2009년 공정거래위원회는 연예인을 위한 표준전속계약서를 마련해 적정 전속기간, 기본권 등을 명시했다. 하지만 이는 권고 사항에 불과해 실질적인 구속력이 없다. 문제를 제기해 신분이 드러나면 해당 분야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현실도 피해자들을 침묵하게 만든다. 문화계에서는 약자인 신고인이 권력을 쥐고 있는 피신고인과 얼굴을 맞대고 피해를 입증하는 절차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제작사, 소속사의 부당 행위에 대한 감시를 의무화하는 정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규진 newjin@donga.com·이지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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