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페어(베페, 육아용품 박람회)에서 유독 호객행위를 하는 코너가 있다. 바로 육아 학습지 및 육아 공부, 육아 교구 관련 코너다. 가급적 피하고 싶은 곳이다. 아내가 둘째를 가졌을 때 첫 째를 데리고 베페에 갔다. 그런데 첫 째가 풍선을 들고 있더라. 이건 뭐지 싶었을 때. 어디선가 육아 학습지 관계자가 불쑥 말을 걸었다. 풍선 공략. 훌륭했다. 아빠를 공략해야 할지, 엄마를 공략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판단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렴 베테랑이시겠지. 엄마를 공략했다. 후훗 잘못 골랐다. 아내는 일단 학습지를 보러 온 것이 아니다. 아내는 노련하게 학습지 홍보물과 간단한 기념품, 사탕이 담긴 봉투만 받고 끝낸다. 아내의 승리다. 간혹 나를 붙잡는 관계자들도 있다. “우리애는 머리가 나빠요”라고 말로 위기를 모면했다.
우연히 다른 부모가 학습교구 상담을 받는 걸 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영상을 많이 보는데. 그러다가 뇌가 터져요” 라고 말했다. 뇌가 터진단다. “뇌가 커진다”를 잘 못 들은 것이라고 믿고 싶다. 아무 말 대잔치다. 나도 언젠간 학습지나 학원도 보내고 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낚이고 싶지 않다. 격세지감을 많이 느낀다.
나도 어릴적 동화 전집이 집에 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요즘은 첨단이다. IT 기술을 접목시킨 펜을 책에 가져다 대면 돼지 소리가 난다. TV로 연결하면 어쩌니 저쩌니. 별별 기능이 다 있다. 최근 동생이 가져온 유아 학습용 OO펜을 사용해봤다. “오매 신기한 것” 펜 하나로 한글, 숫자 등등 공부가 되다니. 어느 순간 내가 더 열심히 하고 있더라.
하지만 솔직해 져보자. 내가 만약 수억 원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면? 아무래도 첨단 문물을 접하는데 있어 더 너그러워 질 것 같다. 자식들의 엄청난 창의력을 발산시켜줄 만큼 여유롭진 않은 아빠들의 주머니 사정이 아쉬울 뿐이다.
그렇다고 아이 학습을 시키지 않을 수도 없다. 나도 전집 비슷한 육아 책들을 샀다. 책과 친해져야 한다며 책장도 샀다. 도형 공부, 숫자 공부, 가족 공부, 탈 것, 먹을 것 등등으로 구분돼 있는 일종의 책 모둠이다. 아이가 “비행기, 사과, 짹짹이, 돼지~”라면서 단어 하나하나 알아갈 땐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아이가 뭔가를 하나씩 배워간 다는 것 자체가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곧 ‘비행기, 사과, 짹짹이, 돼지’ 가 너무 시시해지는 시기가 오더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거(유아책) 어디 팔 곳 없나” 너무 찌질해 지는 순간이다. 이래서 주변 사람들끼리 물건을 주고 받는가보다. 이래서 중고나라와 같은 중고장터가 생겨나나보다. 이래서 둘째를 가지나보다는 아니고…
한 선배 아빠가 그랬다. 어떤 첨단 문물이냐 보다 어떤 문물이던 그걸 가지고 재미있게 최선을 다해 아이와 놀아주는 것이 최고라고. 아무렴! 첨단 문물이 아니면 어떠하리. 잠자기 전 침대에 누웠을 때 아이가 책이나 장난감을 가지고 와서는 “아빠 책 읽어 줘요” “같이 놀아요오~”라고 할 땐 얼마나 행복한데.
처음엔 동화책 읽어 주는 것도 어설 펐는데 어느 순간 구연 동화를 하고 있다.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괴물 소리와 동물 소리는 곧 잘 낸다. 하지만 나도 피곤해지는 어느 순간이 있다. 자고 싶을 때가 있단 말이다. 한 취재원은 피곤한 나머지 동화책을 대충 읽었다가 아내에게 크게 혼났다고 한다. 그 취재원은 “이런거 한다고 아가 천재 안 된다.”라고 했다가, 형수님이 정색을 하며 “네가 원랜 천재였는데 어릴 적에 제대로 안 배워서 바보(?)가 됐을 지도 몰라”라고 응수했다나.
그 뒤로 그 취재원은 열심히 동화책을 읽어 준다고 한다. 나도 피곤할 때면 만사 귀찮지만, 선배의 말을 떠올리며 책을 읽어준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머릿속에서 IT 기술과 사물인터넷(IoT) 기술 등으로 무장한 최신 OO펜과 첨단 학습 교구들이 계속 떠오르는 건 왜일까?
변종국 기자 bj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