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0일은 복잡다단한 한일관계에 또 다른 획을 그은 하루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난마같이 엉킨 과거사의 실타래를 쾌도난마처럼 끊어낸 날이 아니라는 점이 안타깝긴 하지만 말입니다. 한민족의 역사에 영원한 오점을 남긴 일제 식민지배라는 과거가 일조일석에 쉽사리 해결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과거를 뒤로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정말로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불행한 과거의 청산이 더딘 것은 상당 부분은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하고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는 일본의 책임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에, 또 과거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하기에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우리 대법원의 판단에 대해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 보겠습니다.
2018년 10월 31일자 주요 일간지의 보도내용.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1면 기사에서 이번 대법원 판단의 핵심을 제목으로 뽑았고, 한국일보는 사법부가 과거 한일 정부의 정치적 흥정에 대해 새로운 판단의 기준을 제시했다는 내용을 강조했습니다.
◇포인트1=핵심쟁점
이번 대법원 판단의 핵심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일본정부가 한국정부(박정희 정부)에 준 5억 달러(무상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 안에 강제징용 피해자를 위한 손해배상금이 포함됐느냐 여부였습니다.
1965년 체결한 협정 2조는 정부 뿐 아니라 국민의 대일 배상청구권도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시했습니다.
근거가 궁금하시죠? 대법원은 1965년 청구권 협정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인정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근거해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한국은 승전국 자격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아닌 식민지 자격의 재산청구권만 인정받은 셈이죠.
일본은 당시 한반도에서 행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제징용 같은 불법행위에 대한 민간차원의 배상청구권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포인트2=일본이 배상금을 줄까?
대법원은 신일본제철에게 피해자(4명)에게 각 1억 원씩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돈을 받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일본 정부가 강력 반발하고 있고, 일본 기업 역시 자발적으로 배상할 것 같지 않습니다. 단돈(?) 4억원 밖에 안 되지만 해당 사안에 대해 극과 극의 인식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은 한 발짝도 물러서려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번 판결에서 강제징용 피해자의 손배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소수의견을 낸 권순일, 조재연 대법관은 “우리 정부가 대신 정당한 보상을 해야한다”고 밝혔습니다.
30일 이낙연 총리는 “피해자들의 상처를 속히, 그리고 최대한 치유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할지 지켜봐야겠습니다.
◇포인트3=한일관계 파국으로 갈까?
과거사에 또 다시 발목을 잡힌 모양새입니다.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방문과 일왕의 방한에 대한 발언 이후 최악의 관계로 빠진 이후 한일 양국은 관계개선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왔습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가 체결한 군 위안부 협상을 사실상 파기했고, 이번에 또 다시 강제징용 배상관련 대법원 판단이 나오면서 과거사의 해결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로 빠진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옵니다.
일단 우리 정부는 법원의 판단과는 별도로 한일관계가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희망을 피력했습니다. 이른바 투트랙 접근을 펼쳐 나가겠다는 취지인데 일본의 대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일본은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가려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이 스스로 맺은 조약마저 지키지 않는 무책임한 국가라며 국제여론전을 펼 가능성도 있습니다. 당연히 양국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촌평
일제의 식민지배가 끝난 것이 벌써 73년이 됐지만 한국과 일본이 과거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결국 문제는 정치권력이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21세기에 이르기까지 과거에 발목잡히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후 재건이 중요했던 정치권력이 일본과 적당한 타협을 통해 포괄적으로 청구권 협정을 마무리 한 것이 빌미를 준 셈입니다.
정치권의 타협에 사법부가 새로운 가이드 라인을 주면서 발생한 혼란을 풀어낼 몫은 이제 외교의 몫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방팔방을 둘러봐도 일본과 교섭할 믿음직한 외교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한반도,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한반도를 위해서라도 책임감 있게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태원 기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