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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복수’ 부부 恨 풀리나… 대법 “성폭행 무죄, 다시 재판”

입력 | 2018-11-01 03:00:00

원심 깨고 유죄취지 파기 환송
“남편 출장간새 조폭 친구가 성폭행”, 30대 부부 1심서 억울함 안 풀리자
“끝까지 복수” 유서 남기고 극단선택… 2심서도 “범죄증명 어렵다” 무죄
대법 “피해자 진술 일관되고 구체적… 하급심서 性인지 감수성 결여”




지난해 5월 충남 논산 지역 폭력단체 조직원 박모 씨(38)가 경찰에 구속됐다. 혐의는 고향에서 30여 년간 가깝게 지낸 친구의 아내 이모 씨(33)를 성폭행했다는 것. 검찰은 박 씨를 같은 혐의로 기소했지만 1심 재판부는 성폭행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이 씨 부부는 억울함을 호소하다 함께 목숨을 끊었다. 이후 대전고법의 2심 재판부도 박 씨의 성폭행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31일 ‘성폭행 혐의가 인정된다’며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왜 1, 2심과 다른 판단을 한 것일까.

○ 1·2심 “구체적 진술 없다” 무죄 판단

2017년 4월 14일 오후 11시 40분경 충남 계룡시의 한 무인(無人) 호텔로 박 씨와 이 씨가 들어갔다. 두 사람은 다음 날 오전 1시 6분경 모텔을 떠났다. 이 씨는 이날 오후 해외 출장을 다녀온 남편에게 전날 밤 모텔에서 벌어진 사건을 털어놨다. 호텔에서 박 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이 씨 부부는 경찰에 박 씨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다. 박 씨는 다음 달 성폭행, 협박, 특수상해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같은 해 11월 재판에 넘겨진 박 씨에게 검찰은 징역 7년을 구형했다. 하지만 대전지법 논산지원은 박 씨의 폭행 혐의만 유죄로 판단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성폭행을 의심할 직접 증거는 피해자 이 씨의 진술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또 이 씨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시간 이후 이 씨와 박 씨가 10여 분간 대화를 나눴다는 두 사람의 진술이 일치하고, 모텔 폐쇄회로(CC)TV 영상 속 두 사람이 앞뒤로 걸으며 모텔을 떠날 때의 모습에서 성폭행이 있었을 만한 정황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봤다.

당시 이 씨는 “성폭행을 당하기 전 5일 동안 박 씨로부터 ‘남편에게 사생아가 있다’, ‘후배들을 시켜 남편에게 연장을 놓겠다(남편을 흉기로 찌르도록 하겠다)’는 협박을 당했고 박 씨가 뺨과 머리를 때렸다”며 성폭행을 당한 게 사실이라고 호소했다. 또 “박 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성폭행을 당한 뒤 잠시 대화를 나눴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협박에 못 이겨 모텔에 끌려갈 때 성폭행 위험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이 없다”며 성폭행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4개월이 지난 올 3월 3일 0시 30분경 전북 무주군의 한 캠핑장 이동식주택에서 이 씨 부부가 숨진 채 발견됐다. 부부가 남긴 A4용지 10여 장 분량의 유서엔 “친구 아내를 탐하려고 비열하고 추악하게 모사를 꾸몄다”, “죽어서라도 끝까지 복수할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등의 박 씨를 원망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올 5월 대전고법은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정을 찾아볼 수 없어 ‘범죄의 증명이 없다’는 원심을 인정할 만하다”며 성폭행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 대법원 “1·2심 성(性)인지 감수성 결여”

그러나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성폭행 피해자가 현장을 미리 벗어날 수 있었다거나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성폭행 혐의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특히 대법원은 1, 2심 재판부가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해 무죄로 판단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원심은 성폭행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아 성인지 감수성을 결여했다는 의심이 든다”며 “이 씨의 진술은 수사기관에서부터 1심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될 뿐만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라고 봤다. 오히려 혐의를 부인한 박 씨의 진술이 모순되고 납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법원은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 문화와 인식 때문에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 가해자와의 관계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김윤수 기자 y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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