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 도쿄 특파원
30일 오후 4시 일본 외무성 내 접견실. 굳은 표정을 한 이수훈 주일 한국대사에게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상은 화난 표정으로 항의하고 있었다. 이춘식 씨 등 강제 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의 원심 확정 판결이 난 뒤 1시간 반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고노 외상은 이 대사에게 악수도 건네지 않았고 모두발언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 작정한 듯했다. 15분간의 면담이 끝난 후 고노 외상은 “(한국 정부가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을 경우)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등 온갖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ICJ 제소’를 일본 정부 고위 관료가 공개석상에서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이 대사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얼어붙은 한일 관계 모습 그대로였다.
이들은 “70년 넘는 시간 동안 가슴에 한을 담고 살아온 피해자들의 응어리를 풀어준 판결”이라며 “한국 사법부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강제 징용 피해자를 위해 발 벗고 나선 지 20년도 넘은 이들 중에는 소감문을 읽으면서 눈가에 눈물이 고인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이번 판결은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잃었던 인권을 회복하는 데 의의가 있을 뿐이지, 한일 간 외교적 마찰을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31일 일본 언론들은 일제히 한국의 일방적인 재판으로 양국 간 관계가 악화될 것이라는 기사를 쏟아냈다. 올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일본의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일본 총리가 채택한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20주년을 맞아 양국에서 한일 문화·인적 교류 활성화 방안 등 미래 지향적인 모습이 나타났으나 이번 판결이 찬물을 끼얹을 것이란 분석도 있었다. 왜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오랜 세월 투쟁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모든 게 한국 때문’이라는 주장을 펴는 언론도 있었다. 판결 하루 전인 지난달 29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국회에서 “한국이 미래지향적인 관계 구축에 역행하는 움직임이 계속돼 유감이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를 하는 등 (강경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한일 관계를 떠나 일본에조차 무슨 도움이 될까요.”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은 31일 기자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북한의 비핵화 문제에 대한 한국과의 협업 등이 필요한 일본 정부로서는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고노 외상은 외무성에 ‘일한 청구권 관련 문제 대책실’을 만드는 등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일 간의 갈등 조정은 둘째 치고, 야노 사무국장과 고노 외상 간 이견이 해소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긴 올까.
김범석 도쿄 특파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