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시대 문화전쟁 글이 무기다] <6> 30조원 넘쳐나는 日 만화시장
만화 ‘고독한 미식가’(아래쪽 사진)의 작가 구스미 마사유키는 “이 작품을 드라마로 만들겠다고 찾아온 제작진은 만화를 수백 번 읽어 대사를 줄줄 외울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이는 TV도쿄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위쪽 사진)의 스토리가 원작에는 없는 새로운 내용임에도 특유의 분위기를 잘 살려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하다. TV도쿄·이숲 제공
부모 손을 잡고 온 어린아이부터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인까지 너 나 할 것 없이 서가에서 뽑아낸 만화를 몇 권씩 쌓아놓은 채 읽고 있었다. 서가 옆에 놓인 안락의자에 기대앉거나 박물관 앞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누워 만화를 읽는 모습에서 만화를 일상의 일부로 함께하는 일본인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옷과 가방에 일본 만화 캐릭터 굿즈를 주렁주렁 매단 외국인들도 눈에 띄었다.
아라마타 히로시 만화박물관 전무이사는 “만화는 일본이 지켜내야 할 문화적 보물”이라며 “최대한 많은 양의 만화를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우리 박물관의 소임이다”고 밝혔다.
일본 만화는 많은 영화 제작자에게 창작의 원천을 제공한다. ‘데스노트’(위 사진) 시리즈는 네 편의 실사영화로 제작됐고, ‘드래곤볼 에볼루션’은 미국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롯데엔터테인먼트·이십세기폭스사 제공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16년 일본의 만화 시장 규모는 약 26억4000만 달러(약 3조 원)로, 전 세계에서 가장 크다. 2∼5위인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을 합친 것보다 크다. 그야말로 ‘만가(マンガ·漫畵) 공화국’이다.
만화는 애니메이션과 드라마, 영화를 비롯해 연극, 뮤지컬, 게임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확장성을 지녔다. 파생 콘텐츠까지 아우르면 일본 만화의 시장 규모는 약 30조 원에 이른다는 분석도 있다. 일본 만화는 바야흐로 세계 콘텐츠 시장의 자양분을 공급하는 원천이다.
2년 전 ‘포켓몬고’ 열풍을 일으키며 가장 성공한 증강현실 활용 콘텐츠로 꼽히는 ‘포켓몬스터’는 세계적 팬덤을 구축하고 있다. 한국에 정식으로 번역 출간된 최초의 일본 만화이자 서구권에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대표적인 ‘양덕’(서양인 덕후) 만화로 꼽히는 ‘드래곤볼’ 시리즈 역시 한 해가 멀다 하고 PC와 콘솔용 게임으로 제작되고 있다.
○ 영상으로 재창조되는 만화 ‘고독한 미식가’
만화 ‘고독한 미식가’는 일본 TV도쿄가 드라마로 만들어 큰 사랑을 받았다. 9월 일본 도쿄 기치조지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 만화의 작가 구스미 마사유키(60)는 활자 콘텐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화든 소설이든,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독자가 머릿속에서 한 편의 영화를 그려내는 것과 같습니다.”
드라마 ‘고독한…’은 언뜻 보면 별다른 내용이 없다. 평범한 세일즈맨인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마쓰시게 유타카)가 일을 마친 후 “배가 고파졌다”는 대사를 날리며 근처 식당에 들어가 ‘혼밥’을 한다. 사람들은 이 ‘아무것도 없는’ 드라마에 열광했다. 2012년 첫 시즌이 방송된 이후 일곱 개의 시즌으로 제작됐으며, 시즌8도 준비 중이다. 중국에서도 판권을 사들여 중국판 드라마가 나왔고, 2018년 말 초연을 목표로 연극으로도 제작 중이다.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어 한국으로 출장 온 주인공이 한국 식당을 찾는 내용을 담은 특별편도 제작됐다.
작가 구스미 마사유키가 한국어로 번역된 자신의 책을 살펴보고 있다. 그는 “한국 독자들이 잠시라도 내 만화를 통해 삶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말했다. 도쿄=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흑백의 그림과 글자만 보고 그 속의 상황을 독자가 스스로 그려내야 합니다. 반면 드라마나 영화 등 영상 매체는 냄새와 맛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직접 전달하기에 시청자가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작죠. 그렇기에 책이야말로 독자 입장에서 가장 창조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콘텐츠입니다.”
만화 ‘고독한…’의 대사량이 많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음식의 맛과 식당의 분위기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는 독자가 음미하며 상상해보기를 원했다. 다니구치 지로 선생(‘고독한…’의 그림 작가)도 음식을 먹을 때 나오는 주인공의 미세한 표정변화를 표현해내는 데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고 설명했다.
만화가 영상으로 재창작되기 좋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읽는 사람마다 해석이 달라질 여지가 많아 제작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기 좋은 ‘소스’가 된다. 시청자 입장에서도 같은 작품이라도 누가 영상화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물이 천차만별이 되니 원작을 읽었더라도 또 다른 해석을 경험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이 만화를 그릴 땐 영상으로 만들어질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 만화에는 이렇다 할 스토리도, 극적인 갈등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만화가 드라마와 연극으로 만들어지는 건, 만화야말로 창작자들이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해 뛰놀 수 있는 바탕이 되는 플랫폼이기 때문이겠지요!”
도쿄·교토=이지운 기자 eas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