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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상습 가정폭력’ 깜깜… 현장 출동해도 훈방 일쑤

입력 | 2018-11-02 03:00:00

신고 무력화하는 ‘法의 허점’




‘전처 살해’ 檢송치 25년간 가정폭력 끝에 이혼한 아내를 흉기로 13차례 찔러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김모 씨가 1일 오전 서울남부지검으로 송치되고 있다. 김 씨는 취재진 앞에서 “아이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뉴스1

“직접 위해를 가한 게 아니어서 처벌은 약할 거예요.”

‘강서구 전처(前妻) 살인사건’의 피해자 이모 씨(47·여)는 2016년 1월 출동한 경찰로부터 이 말을 듣고 집에 돌아와 짐을 쌌다. 2015년 2월 전남편 김모 씨(49)에게서 심하게 폭행을 당한 이 씨가 김 씨를 피해 도망 다니다가 겨우 자리를 잡았던 안식처였다. 김 씨는 이 씨의 거처를 찾아낸 뒤 칼과 밧줄을 들고 와 협박했고 이를 본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던 것. 하지만 당시 출동한 경찰은 이들 부부가 ‘고위험(A급) 재발우려 가정’으로 분류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시 훈방 조치된 김 씨는 그로부터 2년 9개월 뒤 이 씨를 살해했다. 경찰은 1일 김 씨를 살인 등 혐의로 송치하면서 뒤늦게 2016년 1월 사건에 대해 특수협박죄를 적용했다.

○ 경찰, 상습 가정폭력 여부 파악하기 어려워

가정폭력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가해자가 상습범이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훈방 조치해 피해자를 위험에 내모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신상정보 공개 대상자나 우범자처럼 ‘상습 가정폭력 사범’을 관리해야 하지만 경찰에겐 그럴 권한이 없다.

현재 경찰의 ‘재발우려 가정 관리 시스템’은 피해자 정보를 기반으로 관리되고 있다. 경찰에 등록돼 있는 피해자의 전화번호로 신고가 접수되거나 피해자, 가해자가 스스로 알렸을 때에만 경찰은 ‘재발우려 가정’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구조다. 가정폭력 신고율이 1% 수준에 불과한 상황에서 상습적인 학대를 당한 피해자가 스스로 피해 사실을 알리기는 어렵다.

이렇다 보니 2012년에는 ‘고위험 재발우려 가정’이던 40대 여성 A 씨가 남편에게 맞아 숨졌다. 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도 경찰이 수차례 출동했지만 피해자가 알리지 않아 가해자는 매번 훈방 조치됐다. 경찰 관계자는 “가해자 정보를 주기적으로 관리, 조회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한다면 사찰, 인권침해 등 비판이 나올 것”이라며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피해자 처벌 의사 없으면 기소 못해

가정폭력 사범 10명 중 9명은 불기소 처분을 받는다. 올해는 7월 말 현재 기소율이 9.1%에 불과하다. 가장 큰 원인은 가정폭력 범죄가 ‘반의사불벌죄’라는 데에 있다. ‘불기소 처분’의 상당수(77%)는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아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이 종결됐다.

수사기관은 피해자의 처벌 의사가 없는 사건 중 가해자에 대한 처분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상담조건부 기소유예’(가정폭력상담소에서 성실히 상담받는 것을 조건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하는 제도)를 취할 수 있다. ‘가정보호 사건 송치’(형사처벌 대신 상담이나 사회봉사 등의 처분을 받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실효성은 의문이다. ‘상담조건부 기소유예자’의 재범률은 전체 가정폭력 사범 재범률과 비슷한 수준이다. 지난해 상담 프로그램을 이수한 가해자가 흉기 등으로 다시 아내를 폭행, 협박한 사례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가정폭력 범죄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피해자의 의사’를 고려해 가해자를 처벌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가정폭력 피해자가 배우자이자 자녀의 아버지인 가해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하기는 어렵다”며 “처벌 의지를 피해자 의사에 맡긴다는 건 국가가 형벌권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재연 한국여성의전화 인권팀장은 “피해자와의 합의를 종용하거나 상담을 조건으로 기소를 유예하는 제도에는 가정폭력을 범죄가 아닌 부부 갈등으로 보는 인식이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