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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세진]‘브로토피아’ 실리콘밸리

입력 | 2018-11-03 03:00:00


전 세계의 구글 직원 수천 명이 1일 한 시간 남짓 동맹파업을 벌였다. 스마트폰 운영체제(OS)인 안드로이드를 만든 앤디 루빈 전 수석부사장의 성추행을 회사가 은폐한 데다 9000만 달러의 퇴직금까지 줬다는 사실이 알려져 공분을 일으켰다. 성추행에 대한 항의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의 본사뿐 아니라 런던, 베를린 등 세계 40여 개 지사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는 점에서 ‘미투’와 ‘타임스업’(성폭력 공동 대처 캠페인)의 새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실리콘밸리의 성추문은 구글만이 아니다. 차량공유업체인 우버의 컴퓨터 엔지니어 수전 파울러는 상사가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해온 사실을 지난해 폭로했다. 회사는 남자를 징계하기는커녕 파울러에게 다른 팀으로 옮기거나 참으라고 종용했다. 창업자인 트래비스 캘러닉이 평소 회사의 사업모델을 ‘매춘 알선업자’ 정도로 비유하는 기업 분위기 탓인지 성추행을 그리 큰 문제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결국 캘러닉은 이사회에 의해 사실상 퇴출됐다.

▷최첨단 기술을 다루는 실리콘밸리에서 왜 성추행과 시대착오적인 남녀차별이 판치는 걸까. 정보기술(IT) 업무는 남성이 적합하다는 편견과 고정관념 탓인지 실리콘밸리의 여성 엔지니어는 20% 정도에 불과하다. 애플의 공동 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처럼 비사교적이면서 컴퓨터만 파고드는 괴짜형의 너드(nerd)가 IT 인재로 유형화돼 버렸다. 애플이 혈중 알코올 농도를 측정하는 기기는 내놔도 여성의 생리주기를 알려주는 장치는 생각조차 못 하는 이유일 수 있다.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장시간 일하는 실리콘밸리 프로그래머들은 마치 미국 대학의 남학생 사교클럽 같은 특성을 띤 ‘브로그래머(브러더+프로그래머)’ 문화를 만들어 냈다. 기술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세계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부심에 충만하다. 단, 이런 자부심은 남자에게만 허용된다는 점에서 ‘브로토피아’라는 책도 나왔다. 머리는 뛰어나되 인성은 배우지 못한 마초 엘리트들이 성적 자유와 다양성에 관용적이었던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오랜 전통에 먹칠을 하고 있다.
 
정세진 논설위원 mint4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