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청춘’ 신성일이 폐암 투병 끝에 4일 영면에 들었다. 지난달 17일 전남 화순의 요양병원에서 진행된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그는 “내년 몸이 회복되면 영화 촬영에 들어갈 것”이라며 열정을 불태웠다. 그러나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그가 꿈꾸던 ‘별들의 고향’으로 떠났다. 동아일보 DB
“나는 내키지 않는 길은 가지 않았다.…‘나는 신성일이다’라는 자존심 하나로 평생을 살아왔다.”(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별은 끝내 별로 살다 갔다. 평생 창공에 머물며 낙조(落照)를 품지 않은 채. 스스로를 ‘쥘리앵’(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 주인공)이라 여겼던 ‘한국의 알랭들롱’ 신성일(申星一)은 4일 또 다른 하늘, 별들의 고향으로 날아갔다. 향년 81세.
신성일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신성일이었다. 꼿꼿하고 강렬했다. 지난해 갑작스럽던 폐암 판정. 모두가 놀라 입을 다물 때도 그는 “그깟 암세포 모두 다 내쳐버리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언론인터뷰가 된 지난달 동아일보의 만남에서도 “할일이 많다. 북한에 있다는 영화 ‘만추(晩秋·1966년)’ 필름을 찾아오고 싶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
패션에도 자부심이 넘쳤다. 고인은 본보와의 마지막 인터뷰 때도 와인 빛이 감도는 빨간 스웨터에 실크스카프를 멋들어지게 곁들였다. 지난달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선 150만원짜리 돌체앤가바나 청바지를 입고 레드 카펫을 뚜벅뚜벅 걸었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처음부터 스타였다. 1959년 5081대1의 경쟁률을 뚫고 배우의 길에 들어선 그는, ‘영원한 동반자’인 아내이자 배우 엄앵란을 만난 데뷔작 ‘로맨스 빠빠’부터 일거수일투족이 주목받았다. ‘맨발의 청춘’ ‘초우’ ‘별들의 고향’ ‘겨울 여자’ 등 찍는 작품마다 저잣거리를 들썩였다.
삶 자체도 세간의 기준과는 결이 달랐다. 1964년 역시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엄앵란과 전격 결혼을 발표했다. 11월 14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두 사람의 혼인식에는 전국에서 3500여 명이 몰려들었다. 정작 최무룡 김지미 등 주요 하객은 식장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2층 테라스 얼굴을 내민 신랑신부를 향한 환호는 영국 왕실 예식이 부러울 것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탓일까. 정치에 입문하면서부터 말 못할 고충도 적지 않았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마포·용산 선거구에 출말했으나 큰 표차를 고배를 마시고 빚더미에 올랐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하며 오랫동안 야인 생활을 했다. 식당을 운영하며 남편 뒷바라지를 하던 엄앵란은 “어디 가도 기죽지 말라”며 매일 10만 원식 쥐어주고 내보냈다. 고인은 2000년 대구 동구에서 세 번째 도전 만에 당선됐다.
그는 마지막까지 신작 영화 제작의 꿈으로 부풀어 있었다. 항암 치료를 마친 후 전남의 한 요양병원에서 한방과 양방 복합 치료를 받으며 기력을 회복했다. 그러나 최근 감기에 걸린 후 급격히 건강이 악화됐다고 유가족이 전했다. 3일 오후 세상은 그의 ‘사망설’로 들썩였지만, 그는 생명의 끈을 쉽게 놓지 않았다. 결국 다음날 새벽 2시반. 거성(巨星)은 마지막 숨결을 거둬들였다.
“나는 자유인으로, 로맨티스트로 살아가고 있다. 젊은 시절 숱한 유혹이나 강압에도 불구하고 권력자에게 무릎 꿇지 않았던 나다. 난 젊은이들에게 ‘정면 돌파하라’고 외치고 싶다.”
은막의 청춘은 시대의 청춘에게 마지막 종언을 고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