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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딴따라 아니다”…자부심 컸던 ‘영원한 영화배우’ 신성일

입력 | 2018-11-05 06:57:00

故 배우 신성일. 사진제공|부산국제영화제


■ 어록으로 돌아본 신성일의 삶

고 신성일은 그야말로 큰 별이었다. 고인과 관련한 혹은 고인이 남긴 말로써 그 삶의 일부를 추억한다.

● “넌 뭐 하러 왔어?”

서울대 상대 진학에 실패한 청년 강신영은 1950년대 말, 집안형편이 어려워지자 서울 청계천에서 호떡을 팔았다. 고교 동창으로 성공한 한 가수를 우연히 만났지만 그가 자신을 데면데면 대하자 배우로서 성공을 꿈꾸며 한국배우전문학원으로 향했다.

1957년 지금의 서울 세종대로 네거리에 자리 잡은 당대 최고의 영화제작사 신필름의 신인배우 공모장을 찾았다. 몰려든 응시생들로 발 디딜 틈 없어 기마경찰이 동원됐다는 사실에서 당시 경쟁률을 짐작케 한다.

이를 보고 응시를 포기하려던 그를 보고 “넌 뭐 하러 왔어?”라고 묻는 이가 있었다.(인터뷰365 2009년 10월22일 보도) 신필름을 이끌던 신상옥 감독의 조감독 이형표 감독이었다. 이 감독은 잘생긴 이 청년에게 곧바로 신 감독을 만나보라 추천했다. 청년은 “예나 지금이나 ‘스타의 문’은 좁다”는 당시 “3600명 중에서 단 한 명 뽑힌”(동아일보 1962년 9월22일 자 보도) 응시생이 되었다.

데뷔작 ‘로맨스 빠빠’(1960년작)에서의 신성일(오른쪽). 사진제공|한국영상자료원


● “뉴스타 넘버원”

신상옥 감독과 그의 ‘동지’이자 아내로 한평생을 함께한 배우 최은희는 ‘뉴스타 넘버원’이라는 뜻을 한자에 담아 ‘신성일’(申星一)이라는 예명을 안겨줬다. 성씨는 신상옥 감독의 것에서 따온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카메라 앞에 내세우기엔 부족했다. 신성일은 신필름 사무실에서 궂은일을 해가며 연기와 영화를 배웠다. 그러는 사이 ‘상록수’와 ‘연산군’ 등에 출연했다. 그는 훗날 “신필름에서 주는 월급으로 승마, 검도, 권투 등 연기자가 필요한 각종 운동을 익히면서 평생을 체력관리에 소홀하지 않은 습관도 가지게 됐다”고 돌아봤다.(위 인터뷰365 보도)

3년의 짧지 않은 ‘트레이닝’을 거쳐 마침내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에 출연하며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다. 막내아들 역할을 맡은 그는 김승호, 최은희, 김진규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과 호흡을 맞췄고 장차 아내가 될 엄앵란을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2년 뒤 ‘뉴스타 넘버원’이라는 예명의 의미를 실현하는 ‘아낌없이 주련다’를 주연작 삼았다. 이후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로 인정받은 그는 이목구비 뚜렷한 잘생긴 외모로 ‘한국의 알랭 들롱’이라는 또 다른 별칭을 얻으며 오랜 시간 톱스타로 군림했다.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으로 스타덤에 오른 신성일(왼쪽). 그는 그해 11월14일 엄앵란(오른쪽)과 결혼했다. 사진제공|한국영상자료원


● “난 딴따라가 아니다”

1937년생인 신성일은 팔순의 나이에 접어들어 폐암과 싸워야 했다. 2017년 이런 사실이 알려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10월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그는 ‘맨발의 청춘’ ‘휴일’ ‘별들의 고향’ ‘길소뜸’ 등 자신의 대표작 8편을 모아 소개하는 특별전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이 되어 젊은 관객을 만났다.

그는 “난 딴따라가 아니다. 배우이다”고 말했다. 그는 “묵묵히 일만 해왔다. 1960년대에 600∼700만원의 세금을 냈다. 현재 가치로 30∼40억원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세금 내면서 영화를 해왔다”면서 “자부심을 갖고 종합예술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이다”고 밝혔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대중은 그를 ‘영원한 영화인’으로서 추억할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그런 그를 “20세기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흐름과 생을 함께한 배우”라고 설명했다. 당시 회고전의 제목은 ‘배우의 신화, 영원한 스타, 신성일’이었다.

윤여수 전문기자 tada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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