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했어서 기억이 안 나요.”
지난달 29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아파트에서 70대 경비원을 폭행해 의식불명에 빠뜨린 혐의를 받는 40대 남성, 앞서 같은 달 4일 경남 거제에서 폐지 줍는 50대 여성을 마구 때려 사망에 이르게 한 20대 남성이 경찰조사에서 한 말이다.
경찰에 따르면 서대문구 사건 최모(45)씨는 처음에는 이렇게 진술했다가 경찰 추궁이 이어지자 범행을 인정했다.
이들이 이처럼 자신의 행위를 인지하고도 음주한 점을 이용해 기억이 안 난다고 나오는 이유는 술에 취했었다는 점이 수사 과정이나 향후 재판에서 참작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고 과거 실제 사례도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2008년 8세 아동을 잔혹하게 성폭행한 조두순이 꼽힌다. 조두순은 만취 상태였다는 이유로 심신 미약이 인정돼 1심 징역 15년에서 2심 12년형으로 감형됐다.
2013년 상해치사죄로 종결된 사건도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재차 논란이 되고 있다. 38세 남성이 같이 술을 마신 동갑내기 직장동료 여성 신체에 팔을 넣어 사망하게 한 사건이다.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그는 2심에서 술에 취한 상태에서 과도한 성행위 도중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점이 인정돼 징역 4년형을 받았다. 가해자는 “미치겠다, 술이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이 사건 재수사를 촉구하는 국민청원에 동의한 이는 이미 20만명을 넘었다.
지난달 12일 리얼미터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음주 범죄는 감형이 아니라 가중처벌 대상이므로 주취감형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80%로 집계됐다.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은 11.8%에 불과했다.
범죄 피의자의 심신장애를 규정하는 형법 제10조는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않고, 이들의 행위에 대한 처벌을 줄이도록 하고 있다. 법적으로 심신미약은 ‘옳고 그름을 따지고 이에 따라 행동할 능력이 상당히 부족한 상태’이다.
허윤 법무법인 예율 변호사는 “정말로 병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처벌보다는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 형법 체계가 가진 목적”이라며 “이제는 법원도 주취감경에 대한 해석을 보다 엄격하게 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실제로 형법 10조3항은 의도적으로 만든 책임 무능력 상황에 대해서는 감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해 악용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술에 취했거나 약을 복용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감형 대상이 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조두순 사건이 논란이 되자 2010년 6월 아동성범죄에 대해 형량을 높이고 주취경감을 배제하는 양형기준안을 만들기도 했다.
음주 등으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몹시 취한 상태에 이른 경우 기존에 일반 감경요인이었던 ‘심신미약(본인 책임 있음)’이라는 부분을 삭제했다. 대신 범죄를 저지를 의사를 가지고 자의로 술을 마신 경우에는 심신미약 여부와 관계없이 일반 가중인자로 반영하기로 했다.
백 변호사는 “아동이나 청소년을 상대로 한 성범죄는 음주 상태인 경우 오히려 처벌이 가중되게 돼 있다”며 “옛날에는 심신미약 조항이 기계적으로 적용이 된 면이 있지만 이제는 음주운전이나 주폭이나 처음부터 자신의 성향을 알고 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 맞다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노영희 법무법인 천일 변호사 역시 “조두순 사건 때문에 시끄러웠던 이후로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