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들 이름이 OO이지? 나 이제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야.”
50대 여성 A 씨는 10월 중순 아들의 이름이 적힌 문자메시지를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이는 A 씨와 한 때 연인관계였던 50대 남성 B 씨. A 씨가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자 B 씨는 한 달 반 동안 수십 차례 메시지를 보내 ‘가족과 함께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A 씨는 B 씨의 접근을 막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경찰에 신변보호조치를 신청했지만 두려운 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 B 씨가 집주소를 아는 만큼 언제든 찾아올 수 있기 때문. A 씨는 “B 씨가 찾아오는 게 아닌가 싶어 현관문이 덜컹거릴 때마다 두려움에 떤다”고 말했다.
‘강서구 전처 살인 사건’ 등으로 가정폭력 심각성이 재조명되는 가운데 40, 50대 중장년층의 ‘데이트 폭력’ 역시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청에 따르면 40, 50대 데이트 폭력은 2016년 3065건에서 지난해 3901건으로 늘었다. 올해는 8월 말 기준으로 2823건을 기록해 이 추세대로라면 올해 전체는 4000건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된다.
중장년층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는 주로 상대방의 자녀를 협박 수단으로 삼는다는 게 특징이다. 상담기관에 접수된 주요 사례를 보면 8월 부산에서는 3년 간 내연관계였던 50대 남성이 40대 후반의 내연녀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 밖에서 숨어 있다가 내연녀의 자녀에게 시너를 뿌렸다. 서울에서는 50대 남성이 내연관계에 있는 여성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린 후에 아들이 나오자 ‘엄마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현관문 인증샷을 찍었다. 그는 ‘헤어지면 위험하다’는 문구와 함께 사진을 전송했다.
이런 이유로 여전히 많은 중장년층 데이트 폭력 피해자들은 외부에 알리지 못한 채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내연관계인 경우 경찰이 개입하면서 교제 사실이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 김도연 소장은 “젊은이들은 밖에서 싸우면서 폭력에 노출되는 경우가 있지만 중장년층은 동거가 많고, 외부의 개입이 적은 만큼 지속적으로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사회적 편견은 신고를 꺼리게 하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다. 전문가들은 중장년층 여성이 데이트 폭력 피해를 호소할 경우 ‘순결하지 않다’고 여기는 문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른바 ‘꽃뱀’ 아니냐는 시각이 담겨 있다. 한 여성단체에는 지난해 경찰에 데이트 폭력 신고를 하러 갔다가 ‘아줌마가 왜 이런 걸 신고하느냐’는 핀잔을 들었다는 상담사례가 접수되기도 했다. 한국여성의전화 최선혜 소장은 “중장년층 기혼 여성의 경우에는 ‘외도한 여자’라는 큰 사회적 편견이 있기 때문에 피해 사실을 감추게 된다”고 말했다.
어렵게 신고를 하더라도 폭력을 근본적으로 막기는 어렵다. 가정폭력 피해자가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할 경우 즉각 신고가 가능한 ‘스마트 워치’를 지급하거나 순찰을 강화한다. 하지만 특별법으로 규정된 가정폭력과 달리 데이트 폭력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것을 원천 차단할 법적 근거가 없다. 경찰청 관계자는 “데이트 폭력의 경우 상담만 하고 신고를 꺼리는데다 긴급조치를 할 법적 근거가 없어 어려움이 있다”며 “현재로서는 신속하게 대응하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