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난 도일의 추리소설 ‘셜록 홈즈’ 시리즈를 토대로 한 BBC 드라마 ‘셜록’은 전 세계 팬을 런던으로 불러모은다.
과거 영국 상류층의 쇼핑 거리였던 팰 맬(Pall Mall)가. 런던 시내 중심지인 세인트 제임스 지구와 트라팔가 광장을 잇는 이 거리엔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대저택이 늘어서 있다.
“이곳은 19세기 상류층 남성들이 비공개 사교 모임을 가졌던 ‘젠틀맨 클럽’입니다. 셜록 홈즈의 형 마이크로프트가 만든 ‘디오게네스 클럽’의 배경이 바로 여기죠.”
‘셜록 홈즈 투어’ 가이드의 목소리에 미국, 스웨덴, 러시아, 중국 등 전 세계에서 런던으로 모인 ‘셜로키언(Sherlockian·셜록 홈즈 마니아를 일컫는 말)’이 귀를 쫑긋 기울였다. 이 투어는 공식 기관이 아닌 개인이 운영한다. ‘셜록 홈즈’는 영국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재창작할 수 있는 퍼블릭 도메인(저작권이 소멸된 컨텐츠)이다. 그래서 셜록 홈즈 박물관, 맥주집 같은 공간으로도 풍부하게 재창작되며 대규모 제작사뿐 아니라 개인까지 먹여 살리고 있었다.
이 투어의 운영자 르위스 스완은 “고전을 다양한 관점으로 즐기는 마니아는 컨텐츠 재해석의 전문가들”이라고 했다. 이처럼 과거의 콘텐츠를 일상에서 즐기고 재창조하는 마니아는 전세계 각국에서 만날 수 있었다.
셜록홈즈 투어. 런던=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셜록에 대한 관심은 20년 주기로 돌아온다”
닉 우테힌(66)은 25년 동안 BBC 등 방송국에서 라디오 프로듀서로 일했다. 그러나 그가 평생 가장 꾸준히 해 온 일은 ‘셜록 홈즈 마니아’다.
“8살 때 ‘바스커빌 가문의 개’로 셜록을 처음 만났죠. 14살 때 책 뒤의 엽서를 보고 ‘셜록 홈즈 협회’에 가입했어요. 30년 동안 협회 저널 편집장을 맡았고, 지금은 명예 회원입니다.”
1951년 결성된 셜록 홈즈 협회는 매년 1월 영국 의회 ‘하우스 오브 커먼즈(하원)’에서 정기모임을 갖는다. 단순 친목모임이 아니라 셜록을 분석하고 토론하는 모임으로 저널에도 가벼운 글부터 ‘유사 논문’까지 게재한다.
10대 때 셜록홈즈협회에 가입해서 평생 활동한 전 BBC라디오 PD 니콜라스 우테힌. 타자기를 쓰던 시절부터 셜록 홈즈 저널을 발간한 닉 우테힌은 드라마 ‘셜록’이 모바일 시대를 위한 재해석이라고 했다. 런던=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저도 셜록 홈즈가 옥스퍼드대에 다녔을 상황을 가정해 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셜록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해요. 셜록의 의상을 입는 모임도 있고, 그 시대 방식으로 크리켓 경기도 해요. 가장 값비싼 취미는 컬렉팅이죠. 소설 원본이나 편지 등을 수집하는데, 애플사 전 최고기술책임자(CTO)가 오리지널 삽화 25개 중 7개를 갖고 있다는 소문도 있죠.(웃음)”
셜록 다큐멘터리에도 여러 번 출연한 그는 “셜록의 재창조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똑똑한 셜록과 평범한 왓슨, 두 캐릭터의 조합이 만든 보편적 스토리가 매력적이에요. 위대한 문학 작품으로 평가되진 않지만, 셜록에 관한 관심은 20년 주기로 끊임없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 윤동주를 기억하는 ‘릿쿄 모임’
도쿄 릿쿄대학에서 만난 ‘릿쿄 모임’의 야나기하라 야스코 씨. 뒤에 보이는 건물은 윤동주 시인이 공부한 옛 도서관으로, 2015년 이곳에서 윤동주 특별전시회가 열렸다. 도쿄=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은 남의 나라/…/대학 노-트를 끼고/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쉽게 쓰여진 시’에서)
윤동주 시인(1917~1945)은 1942년 일본 도쿄의 릿쿄(立敎)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이 시기 대표작 ‘쉽게 쓰여진 시’를 썼다. 이곳에선 매년 2월 윤동주의 기일을 전후해 그를 기리는 추모식이 열린다.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 모임’이 주최하는데, 매년 행사 때면 250석 규모의 고즈넉한 성공회 예배당에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다.
‘릿쿄 모임’은 ‘육첩방’의 위치가 ‘도쿄 신주쿠 구 다카다노바바 1초메’이며, ‘늙은 교수’는 동양철학을 가르친 우노 데츠도 교수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모임을 결성한 릿쿄 대학 동문 야나기하라 야스코 씨(72·여)가 20년 넘게 윤동주의 발자취를 수소문한 끝에 이룬 결과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윤동주의 시를 대사로 사용한 연극을 만들어 DVD로 제작하거나,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 팀을 초청해 교정에서 공연을 여는 등 문화 사업도 진행한다. 2010년부터 릿쿄 대학에서 운영하고 있는 ‘윤동주 장학금’ 또한 이들의 노력에 의해 탄생했다.
릿쿄대학은 윤동주가 다닌 학교라고는 하지만 6개월 남짓, 그것도 청강생 자격으로 다녔을 뿐이다. 게다가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장 간절하게 드러낸 시인이 아닌가. 야스코 씨와 ‘릿쿄 모임’에게 윤동주가 이토록 특별한 존재인 이유를 물었다.
“우리가 윤동주를 사모하는 것은 시어 하나 하나에서 청년 윤동주의 고뇌와 아픔이 절절이 묻어나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이 아름다운 청년을 아프게 한 우리(일본) 역사의 과오를 꼭 기억하고자 합니다.”(야나기하라 야스코)
● 민요와 메탈 결합시킨 언어학 마니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만난 페로제도 음악가 헤리 요엔센(왼쪽)과 스웨덴 음악 기자 이카 요하네손. 스톡홀름=임희윤 기자 imi@donga.com
“페로제도는 북유럽 국가들 중에서 전통 민요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나라예요. 결혼식과 국가의식이 있을 때마다 불리죠.”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 사이에 위치한 페로제도에도 괴팍한 마니아가 있다. 북유럽 신화와 바이킹 영웅담을 주요 소재로 한 음악으로 인기를 얻은 헤비메탈 밴드 ‘튀르(T¤r)’의 리더인 헤리 요엔센(45). 그는 튀르의 뮤직비디오 속에서 그는 전기기타와 검을 휘두르며 근육질 고대 영웅을 연기하지만 사실은 책벌레이고 언어학과 문학 마니아다.
“20대 초반에 인도유럽어족 언어 비교학을 전공하기 위해 덴마크로 유학을 갔어요. 근데 헤비메탈에 너무 심취해 음악으로 전공을 바꿨죠.”
메탈 음악이 좋았지만 열 살 무렵부터 자신의 세계를 뒤흔든 북유럽 신화와 바이킹 이야기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침 덴마크 록 가수 페르 프로스트가 페로제도 민요 ‘푸글라그라야’를 활용해 만든 곡이 나와 자극 받았다. 메탈과 신화, 둘을 합쳐보기로 했다.
그는 북유럽과 페로제도의 민요를 뒤져가며 그 선율과 가사를 자신이 지은 메탈 선율에 합쳐 창작했다. 튀르의 음악에 5박, 7박 같은 변칙박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고대의 운율에 음악을 맞추다보니 자연스레 생긴 현상이다. 팀명인 ‘튀르’ 역시 북유럽 신화 속 신의 이름. 요엔센은 2013년, 메탈 밴드 활동을 잠시 쉬고 늦깎이 학생으로 이번엔 코펜하겐의 학교가 아닌 자국 페로제도 대학교에 재입학해 페로제도어문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런던=김민 kimmin@donga.com/페로제도=임희윤/도쿄=이지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