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즌 KLPGA투어에서 대상을 다투고 있는 최혜진(왼쪽)과 오지현. 두 선수는 모자에 새겨진 메인스폰서 로고를 가리지 않기 위해 선글라스를 정수리 쪽에 걸치고 카메라 앞에 섰다.
프로골퍼는 모자가 ‘간판’이라는 얘기가 있다. 가장 노출이 잘 되는 모자 정면에 메인 스폰서 기업의 로고를 새기기 때문이다. ‘프로=돈’이라고 했던가. 국내 대기업이나 글로벌 업체와 계약된 선수는 그만큼 자부심도 크다. 지명도가 낮은 기업의 후원을 받는 선수는 주위로부터 “거기 뭐하는 데냐”며 짓궂은 농담을 듣기도 한다.
선수 후원에 거액을 투자한 업체 입장에서는 회사 로고가 언제나 어디서든 잘 보이기를 원하는 게 당연한 권리다. 선수와 계약서를 쓸 때 대회 뿐 아니라 팬 사인회, 기자회견 등 공식석상에서는 꼭 모자를 써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현역 시절 모자에 선글라스를 걸친 채 티샷을 하고 있는 박세리(왼쪽). 대회 도중 선글라스를 머리 뒤쪽으로 뒤집어 쓴 이정은(가운데). 최근 KLPGA투어에서 첫 승을 거둔 뒤 모자에 찍힌 메인 스폰서 로고 위로 선글라스를 걸친 박결.
최근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선수들은 대부분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경기에 나선다. 선글라스를 잠시 벗을 때에는 모자 로고를 가리지 않도록 꼼꼼히 신경 쓰는 게 이젠 일반적이 됐다. 선글라스를 모자 맨 윗부분에 걸치거나 뒤로 돌려쓰기도 한다. 한 선수 매니지먼트 업체 팀장은 “선수 교육 때 선글라스 착용법에 대한 교육도 실시한다. 스폰서 업체와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나 혹시 모를 계약 위반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다”고 말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개척자인 박세리는 선글라스 분야에서도 선구자로 꼽힐 만하다. 박세리는 2002년 선글라스로 모자에 부착한 후원사 삼성의 로고를 자주 가려 갈등설을 부추기다 결국 결별했다. 당시 박세리는 우승을 차지한 오피스디포대회에서 사흘 내내 모자챙 위에 선글라스를 얹고 플레이하더니 시상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두고 삼성과 계약조건을 둘러싼 이견이 심해지면서 무언의 시위를 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그 후 박세리는 CJ와 장기 계약을 했다.
한 스포츠 마케팅 전문가는 “박세리는 프로 선수 계약에서도 다양한 선례를 남겼다. 최근에는 선글라스와 같은 사안으로 문제가 불거진 적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 이왕이면 다홍치마
메인스폰서가 없는 경우 가족이나 지인들을 돕기 위해 모자에 로고를 붙이는 경우도 있다. 박세리는 CJ와 계약이 끝난 한동안 언니가 직접 디자인한 자신의 이니셜인 ‘S’ 로고가 박힌 모자를 착용했다. 박세리는 한때 ‘온다 도로(ONDA D’ORO)‘라고 적힌 모자를 쓰고 나와 궁금증까지 일으키기도 했다. 이 모자를 착용하고 모처럼 LPGA투어에서 우승한 뒤 누리꾼들은 “도로 온다’는 뜻으로 재기 의지를 담긴 게 아니냐는 해석을 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오랜 세월 자신을 후원한 지인이 만드는 최고급 와인의 이름이었다. 박세리는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 사용하게 됐다고 밝힌바 있다.
박세리와 함께 LPGA투어 진출 1세대인 박지은도 2000부터 3년 가까이 스폰서가 없었는데 대신 아버지가 인수한 기업의 브랜드를 홍보하기 위해 로고를 단 적도 있었다.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서 뛰고 있는 강성훈은 남다른 모교 사랑으로 유명하다. 지난해까지 몇 년 간 출신 학교인 ‘연세(YONSEI)’라고 적힌 모자를 쓰고 대회에 나섰다. 이전 시즌 강성훈의 모자에는 ‘CJ’가 새겨졌다.
모교인 연세대 모자를 쓰고 투어 활동을 했던 강성훈.
‘골프여제’ 박인비가 스타 탄생을 알린 무대는 2008년 US여자오픈이었다. 당시 만 19세로 역대 최연소 챔피언에 오른 박인비 모자에는 LPGA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미국 유학을 떠나 미국 주니어 무대를 휩쓸었던 그였지만 그때만해도 메인스폰서가 없었다. LPGA는 후원사가 없는 선수들에게 투어의 모자나 백을 쓰게 하고 5위 이내에 들면 1000달러를 보너스로 주고 있었다.
2008년 US여자오픈 우승 당시 LPGA 로고 모자를 쓴 박인비.
모자를 통해 애국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국 남자 골프의 양대산맥으로 불렸던 최경주와 양용은도 무적(無籍) 선수 시절이 있었다. 서브 스폰서는 있지만 메인 스폰서를 찾지 못했던 것. 나이키 골프와 결별 후 최경주는 PGA투어에서 태극기를 새긴 모자를 썼다. 양용은도 KOTRA 로고가 달린 모자를 쓰고 출전하기도 했다. 두 선수는 한국이란 국가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최경주는 ”태극기를 달면 행동도 조심하게 되고 사명감까지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양용은 역시 ”국가에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큰 영광이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회상했다.
최경주 태극기 모자(왼쪽)와 양용은 코트라 모자.
호주의 여자 백상어 캐리 웹은 모자에 모국의 상징인 ‘캥거루’를 새겨 넣기도 했다.
후원 회사가 없어 아예 아무 로고가 없는 민무늬 모자를 쓰는 경우도 있다. 한국과 미국에서 상금왕을 차지한 신지애도 하이마트 계약이 종료된 뒤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로고 없는 흰색 모자를 썼다.
전인지 역시 하이트와 결별 후 아무 로고도 없는 모자의 양쪽 사이드에 서브 스폰서 로고만 붙인 채 LPGA투어 활동을 했다.
2017년 에비앙챔피언십에 출전한 전인지는 당시 메인스폰서가 없어 아무 로고도 없는 모자를 썼다.
톱스타의 경우 민무늬 모자가 스폰서 업체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게 해 계약 성사에 도움이 된다는 분석도 있다. 선수 입장에서는 흰 모자를 보며 정신력을 다지기도 한다. 성적을 내야 그만큼 좋은 성적으로 대박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어서다.
한 유명 골퍼는 부진이 오래되면서 대기업과 후원 계약이 끊길 위기에 몰리자 ”후원금은 없어도 되니 로고만이라도 달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