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금융이 강한 경제 만든다]1부 손발 묶인 ‘걸리버 금융’ <2> 세계는 규제완화, 한국은 규제족쇄
지난해 10월 로레타 메스터 미국 클리블랜드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뉴욕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금융규제를 이같이 비유했다. 시스템 위기를 막기 위해 금융규제가 필요하지만 혁신까지 막아선 안 된다는 지적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강화되던 금융규제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세계 각국은 금융산업이 새롭게 도약할 수 있도록 족쇄를 풀어주고 있다. 한국 금융이 시대에 뒤떨어진 ‘갈라파고스 규제’에 꽁꽁 묶여 있는 동안 세계 금융산업은 규제 빗장을 풀고 훨훨 날아오르는 모습이다.
세계 주요국은 정보기술(IT)과 금융이 결합한 핀테크 산업의 혁신을 장려하기 위해 기존 규제를 면제해주는 파격적인 실험을 하고 있다. 가장 앞선 곳은 영국이다. 2014년 런던을 ‘글로벌 핀테크 수도’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뒤 세계 최초로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했다.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뛰놀 수 있는 모래 놀이터처럼 규제 없는 환경을 조성해주고 마음껏 혁신적인 실험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규제 샌드박스에선 새로운 서비스에 대해 심사를 거쳐 시범사업, 임시허가 같은 방식으로 각종 규제를 면제하거나 유예해준다. 테스트가 끝나면 성과를 평가해 상용화 여부를 결정한다. 영국은 2016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네 차례에 걸쳐 89개 기업을 규제 샌드박스 대상으로 선정했다. 블록체인을 이용한 해외 송금과 주식 발행 서비스, 소비자의 운전 습관을 모니터링해 보험료를 할인해주는 애플리케이션 등이 이를 통해 현실화됐다.
영국의 성공을 확인한 싱가포르, 호주, 스위스 등 20여 개국이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도입했고 ‘글로벌 샌드박스’를 구축하는 국제 공조도 시작됐다.
○ 꼴찌에서 1등 만든 중국의 ‘네거티브 규제’
2004년 간편결제 서비스 알리페이를 개발한 알리바바그룹은 성공을 확신하기 어려웠다. 정부가 은행이 독점하는 지급결제 시장의 개방을 허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마윈 알리바바 회장조차 감옥에 갈 각오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낙후된 금융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한다는 생각으로 신산업의 등장을 내버려뒀다. 알리페이를 남부지역에 시범적으로 허용했다가 성과가 나타나자 바로 전국으로 영업 범위를 확대해줬다.
아울러 시장 진입 규제를 풀어 비(非)금융사가 금융산업에 진출해 혁신을 주도하도록 유도했다. 이런 유연한 규제 환경 속에서 알리바바는 대출 중개, 신용평가, 온라인펀드·보험 등으로 빠른 속도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 은산분리 한국선 논란, 세계는 이미 사문화
한국에서 “재벌이 금융을 사금고화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온갖 조건을 달아 간신히 인터넷은행에 한해 예외를 둔 ‘은산분리’(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소유 제한) 규제도 해외에선 이미 사문화된 지 오래다. 일본은 2005년 은산분리 규제를 과감히 풀어 산업자본이 은행 지분을 100% 소유할 수 있게 했다. 그러자 IT, 유통, 통신, 전자 등 다양한 대기업이 뛰어들어 최근 6년간 일본 인터넷은행 산업은 2배 이상으로 성장했다.
유럽도 적격성 심사를 통과한 대기업은 은행을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미국 연방정부는 원칙적으로 대기업의 은행 소유를 금지하고 있지만 캘리포니아 하와이 콜로라도 인디애나주(州) 등에선 대기업이 은행을 100% 소유할 수 있도록 해준다.
손성원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채널아일랜드 석좌교수는 “규제를 아예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유연하게 하자는 것”이라며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선 강하게 규제하되 전문 영역에 대해서는 시스템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느슨하게 규제하는 미국식 규제 철학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재영 redfoot@donga.com·김성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