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금융이 강한 경제 만든다]1부 손발 묶인 ‘걸리버 금융’ <2> 세계는 규제완화, 한국은 규제족쇄
카드업계는 최근 종이영수증과 회원 약관을 ‘전자문서’로 제공할 수 있도록 정부에 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카드사는 현행법에 따라 5만 원이 넘는 결제는 반드시 종이영수증을 출력해야 한다. 카드를 발급하거나 약관을 변경할 때도 꼭 서면으로 알려야 한다.
카드업계는 “영수증과 약관을 e메일이나 문자메시지로만 보내도 연 300억 원을 줄일 수 있다. 가뜩이나 가맹점 수수료 인하 압박을 받고 있어 비용 절감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노인 등 금융소비자가 e메일, 문자를 받지 못해 피해를 볼 수 있다며 이를 묵살하고 있다. 급변하는 금융환경 변화에 맞춰 규제를 손질하고 예측 가능한 규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지만 정부는 귀를 닫고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 들어 명문화된 법 제도 못지않게 구두 개입, 가격 통제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림자 규제’가 금융회사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대출 신상품을 개발한 A 은행은 금융감독원에 인가를 신청했다가 애만 태우고 있다. 금감원이 처음에는 “이 상품이 왜 필요하느냐”며 캐묻더니 지난달엔 “국정감사로 바쁘다”며 인가를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은행 임원은 “신상품을 개발해 출시하기까지 절반의 기간은 금융당국 인가를 받는 데 걸린다”고 말했다.
금융회사가 새로운 비즈니스를 발굴해도 정부의 늑장 대응으로 속을 끓이는 일이 허다하다. 금감원이 신상품 약관 심사를 두고 반송, 철회를 남용한다고 감사원이 지적할 정도다. B 카드사 관계자는 “예전에는 신상품 약관 신청을 하면 3주 만에 인가가 떨어졌는데 올 들어선 몇 달씩 걸린다”고 지적했다. 한 금융사 최고경영자(CEO)는 “정부는 규제 완화책을 찾기보다 새로운 규제를 찾는 데 몰두한다”고 말했다. 실제 김선동 자유한국당 의원실이 금감원이 7월 발표한 ‘금융감독혁신 과제’를 분석한 결과 ‘규제 신설’(18개)이 ‘규제 완화’(9개)의 2배나 됐다.
○ ‘포지티브 규제’ 혁신 막아
동아일보가 금융권 CEO 60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40%가 한국의 금융 규제 수준에 C학점을 줬다. D, E등급을 매긴 CEO도 각각 28%, 17%나 됐다. 특히 법령에 나열된 사업 외에는 허용하지 않는 ‘포지티브 규제’가 한국 금융의 혁신을 막고 있다. 새로운 기술이 실시간으로 나오고 세계적으로 금융과 이(異)업종의 융합이 활발하지만 한국에선 기존 법의 틀을 뛰어넘는 신사업이 등장하기 힘든 구조다.
국내 보험업계는 개인정보보호법, 의료법 등 각종 규제에 막혀 다양한 헬스케어 상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해외에선 개인의 의료정보와 금융정보를 결합하고 블록체인, 가상현실(VR)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헬스케어 서비스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선 걷기, 달리기, 금연 같은 건강관리 목표를 달성하면 보험료를 깎아주거나 포인트를 주는 초보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
○ 시장경제 무시한 ‘가격 개입’
무엇보다 현 정부 들어 정부의 ‘가격 개입’이 노골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실손보험료를 시작으로 은행 대출금리, 카드사 수수료까지 전방위적 가격 인하 압박이 이뤄지고 있다.
현재 당정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소상공인의 부담을 줄이겠다며 카드 가맹점 수수료 인하를 추진하고 있다. 해외에선 카드 수수료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제한이 전혀 없다. 하지만 국내 카드업계는 법으로 정한 정례 수수료 개편을 포함해 정부와 정치권의 압박에 못 이겨 2007년부터 9차례나 수수료를 낮춰야 했다. 금융노조마저 “정부와 여당이 근본적 해법을 찾기보다 카드 수수료를 희생양으로 삼은 ‘가짜 굿판’을 계속하고 있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이 여파로 카드업계의 구조조정은 가속화하고 있다. 국내 7개 카드사 중 올 들어 신한카드와 KB국민카드가 희망퇴직으로 223명을 내보낸 데 이어 현대카드가 창사 이래 처음으로 이달 들어 희망퇴직 접수를 시작했다. 이명식 상명대 교수(신용카드학회장)는 “가맹점 수수료 인하로 경영난에 몰린 카드사들이 신용대출을 늘리거나 서비스 혜택을 축소해 소비자들만 피해를 보게 됐다”고 지적했다.
조은아 achim@donga.com·박성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