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인형의 집’
은행장 남편을 둔 아내, 세 아이의 엄마인 노라(정운선). 겉으론 부족한 게 없는 듯하지만 의료용 침상 같은 공간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노라는 병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서울 예술의전당 제공
입센 작품 중에서도 여성 해방과 성평등 문제를 환기시킨 것으로 유명한 ‘인형의 집’이 6일부터 최근 어느 때보다 젠더 이슈로 뜨거운 국내 무대에 올랐다. 줄거리는 원작을 그대로 따라간다. 주인공 노라는 남편을 요양시키려 몰래 급전을 얻었다. 건강을 되찾은 뒤 그 사실을 안 남편은 돌변한다. 자신이 남편의 ‘인형’일 뿐이었음을 깨달은 노라는 자신의 삶을 찾아 가족을 떠난다.
하지만 강렬한 오프닝에서 보듯 이번 공연은 러시아 최고 권위의 연극상인 ‘황금마스크상’을 수상한 유리 부투소프(57)의 파격적인 연출이 두드러진다. 극의 줄기 외에는 대부분 전위적 변형이 가해졌다. 예컨대 원작에는 지문이 없지만 이번 무대는 랑크 박사(홍승균)가 극의 해설자처럼 지문을 읽어준다. 그는 “그, 그녀, 그게 뭐 중요한가요? 우리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라는 대사를 반복적으로 던지며 추상적으로 재구성한 장면의 문제의식을 분명히 한다.
139년 전만 해도 가정을 버린 노라의 가출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파격적으로 와 닿지 않는 오늘날,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이 작품은 여성의 자기선언을 넘어 더 깊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부투소프 연출은 “후퇴와 진전을 반복하는 여성 문제뿐 아니라 이기심과 선택, 책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파격적인 재해석이 오히려 고전의 가장 충실한 번역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일깨운다. 25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3만∼7만 원.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