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가 명저 ‘외교’에서 강조했듯… 협상의 목적지는 압박보다 덜 매력적 김정은과 협상은 그와 共存 전제로 하나 다만 핵을 가진 채로의 공존은 안 돼… ‘미션 임파서블’ 앞에서 더 냉철해야
송평인 논설위원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 이후 소련, 즉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트루먼에 이어 집권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의 존 덜레스 국무장관은 동서(東西) 갈등을 외교적 문제가 아닌 도덕적 문제로 보고 소련 체제 내에서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어떤 협상도 성과가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키신저는 조지 케넌 식의 봉쇄 정책은 소련 체제 내의 근본적 변화를 유도한다는 목적은 훌륭하지만 그 변화가 일어날 먼 훗날까지 참고 견뎌야 하는 긴 여정(旅程)을 위해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공황은 시장에 맡겨두면 언젠가는 극복되지만 그 언젠가가 사람들이 다 죽고 난 뒤라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비판한 것과 비슷하다. 키신저나 케인스나 치밀한 현실감을 가진 천재였다.
그러나 협상에 임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협상의 목적지는 압박의 목적지보다 훨씬 덜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감수해야 한다는 게 키신저의 주장이다. 공산주의를 민주주의와 인권의 관점에서 근본적 결함이 있는 체제로 보는 이들에게 키신저의 논지가 비도덕적으로 보이는 것은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이 결국 공산주의자들과의 공존(共存)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유화정책은 김정은과의 공존으로 갈 수밖에 없다. 유화정책으로 비핵화조차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김정은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핵무기를 교묘히 분리하면서 미국의 국익과 한국의 국익을 디커플링(decoupling)시키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ICBM 개발 중단과 미래 핵의 포기만으로 만족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한국으로서는 김정은과의 공존이 아니라 핵을 가진 김정은과의 공존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 관계자들은 말로는 반드시 협상으로 비핵화를 이루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에 가깝다는 건 그들 스스로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 체제는 옛 소련 체제보다 더한 허약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유화정책은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면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긴 우회로일 수 있다고 여길 수 있다. 그 정도의 높은(혹은 과도한) 낙관을 가질 수 없다면 압박론자가 될지언정 유화론자는 될 수 없다.
다만 키신저의 협상론은 피 한 방울도 나올 것 같지 않은 냉철한 현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가 공산주의자들의 말을 믿어서 공산주의자들과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다만 공산주의자들이 체제 유지를 위해 차마 입으로 말하지 못했던, 말 너머의 허약한 현실을 봤기 때문에 한편으로 압박하면서도 한편으로 협상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이 공산주의자를 솔직 담백하다고 평가하며 유화정책 일색인 현 정부와의 차이다.
키신저가 ‘외교’에서 프랑스 리슐리외 추기경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냉전 이후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의 근거를 이끌어내는 논지는 감탄을 자아낼 정도다. 그러나 현실은 늘 천재의 분석도 가볍게 뛰어넘는다. 소련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키신저의 데탕트가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순 없지만 결정타를 가한 것은 소련을 힘으로 압박한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